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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광열 Mar 16. 2024

손님, 맥주 한잔 하시죠

따뜻한 사진관 _ 여덟 번째

신호대기 중 잠시 앉아서 쉬시라고 사진관 앞에 놓아둔 의자에는 연세가 있는 어르신들만 앉는 건 아니다. 유치원 하원 때는 아이들이 앉기도 하고 학생들 하교시간에는 학생들도 앉아 있을 때 있었다. 6월 말 점점 기온은 올라가고 더울 때는 여름이 온 것처럼 더울 때도 종종 있었다. 그날은 중년의 남자손님이 의자에 털썩 앉아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카카오톡 사진인화에 관한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들고나가 손님과 인사 나누며 전해드리려 문을 열고 나갔다. 순간 내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의자에 앉아 땀을 닦고 있던 손님이 한쪽 다리를 분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잠시 그대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춰있던 나의 인기척을 느낀 손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자 비로소 얼음이 풀렸다.


"안녕하세요, 많이 더워졌죠?"

"네네, 이젠 여름날씨네요. 하이고~ 마침 다리가 아팠는데 여기 의자가 있어서 참 좋네요"

"사진관에서 안 쓰고 있던 의자여서 이렇게 내어놓으니 쓸모 있는 의자가 되었네요."

"쓸모라... "

한 손에 분리된 의족을 들고 있던 손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점심을 드시면서 반주를 한잔 하셨는지 손님에게서 술냄새가 살짝 느껴졌다. 나는 전단지로 분위기를 돌려보려 했다.

"핸드폰 사진 인화하시고 싶을 때 이젠 집에서 카톡으로 펀하게 보내주시면 됩니다. 번거롭게 사진관에 오셔서 하나하나 고를 필요가 없습니다. 카톡으로 보내고 편한 시간에 찾으러 오시면 끝^^"

전단을 받아 우측 다리 위에 올려두곤 왼쪽 의족을 끼우셨다. 마침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하이고~ 집에 가서 한번 읽어볼게요. 잘 쉬었습니다."

하이고~를 자주 사용하시는 게 아무래도 걷거나 앉고 일어나실 때 힘이 든 것 같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왼쪽 발을 한 번 두 번 체크하시고는 길 건너편으로 절룩이며 걸어가셨다.




사진관 인수 후에 소개받은 액자공장을 다녀왔다. 수지액자 틀을 사선으로 잘라 연결해서 원하는 사이즈의 액자를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수지액자는 간단히 설명하면 나무모양으로 만든 플라스틱액자라고 보면 된다.)


수지액자의 다양한 여러 종류중에 가장많이 무난히 팔리는 디자인이다.


집에서 사진관으로 출근하는 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1개의 주문이 들어와도 바로바로 직접 찾으러 가곤 한다. 그리고 8R, 11R사이즈등의 액자는 손님들이 자주 찾는 사이즈여서 어느 정도 사진관에 재고로 마련해 두었다. 사진관 벽에는 그보다 더 큰 16R, 20R, 30X20인치 등의 가족사진 액자가 걸려있었다. 이 좁은 사진관에서 겨우겨우 찍었을 것 같은 사진과 9명의 대가족 사진은 아마도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아닌 것 같았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 저 정도의 사이즈 액자들을 원하실까?' 샘플이라 함은 손님이 원하는 상품에 대한 실물이나 모형등을 전시해 놓는 것일 텐데 이곳에 걸려있는 액자들은 이 좁은 사진관에서는 소화하기 힘든 대형사이즈의 액자들만 걸려있었다. '샘플을 바꾸자' 마음먹고 이곳에서 필요한 액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수지액자는 보통 영정사진이나 중장년층의 손님들이 찾으시곤 했다. 우리 집만 생각해 봐도 수지액자는 하나도 걸려있지 않다. 그리고 이곳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액자로 만드는 것보다 핸드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면서 그중 잘 나온 사진을 액자로 만드는 분들이 많아 좀 더 트렌디한 액자가 필요했다. 원목액자, 유리액자, 아크릴액자등 다양한 상품군을 준비해 쇼윈도와 사진관 내부에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해 두었다. 그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인화된 사진을 보시던 손님이 8R이하의 작은 액자들을 보면서 잘 나온 사진 한두 장을 탁상용 액자에 넣어서 가셨다. 그리고 견물생심이라고 아크릴액자의 쨍한 느낌이 단연 눈에 띄어서 그런지 8R~11R사이즈로 혹은 요즘 핸드폰 비율에 맞게 정사각 혹은 16대 9의 비율로 맞춤 액자를 만들 수 있어서 아크릴액자도 반응이 좋았다.


딸랑~

며칠 전 가게 앞에서 전단지를 전해드렸던 하이고 아저씨가 사진관을 찾아주셨다. 사진을 인화하려고 하는데 전단지의 내용을 좀 설명해 달라고 하셨다. 일단 휴대폰의 카톡으로 들어가 사진관을 추가하고 사진을 전송하는 방법과 주의사항을 설명드렸다. 사진을 인화하기 위해 카톡으로 "전송할 때는 꼭 '원본'체크를 하고 전송해 주세요. (이걸 안 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이것에 대해 카톡에게 할 말이 많지만 다음으로)

간단하죠? 이쪽에 앉으셔서 천천히 골라서 보내주세요."

손님은 카운터 뒤의 의자에 앉으셔서 휴대폰 사진을 하나씩 하나씩 고르고 계셨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나는 이제 상관없다. 그동안 나는 다른 업무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증명사진 손님이 오셨고 증명사진을 촬영하고 보정해서 인화하는 동안에도 하이고 아저씨는 휴대폰 속 사진을 고르는데 집중하고 계셨다.

PC의 카카오톡을 확인해 보니 30장 한 묶음이 전송되어 있었다. 지금도 사진을 고르고 계신걸 보니 인화할 사진이 더 있으신 듯 보였다. 사진을 다 고르고 바로 인화해 건네어드리자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사진을 보시던 손님은 단체 사진 한 장을 건네주시면서 진열대에 놓인 아크릴액자처럼 만들어달라고 하셨다.

"아크릴액자는 공장에 주문해서 3~4일 정도 소요되고요.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주말제외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인화도 액자추가도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이때까지는...



월요일

아크릴액자는 결혼식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신랑 신부의 야외촬영 사진을 커다란(30X20인치) 아크릴액자로 만들어 식장 앞에 이젤 위에 두세 개 전시해 두고 테이블 위에 미니액자 5개 정도 세팅해 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보통 아침 출근 전에 공장에 직접 들러서 액자를 찾아온다. 공장 측에서 정해진 요일에 직배송을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공장을 찾아가는 이유는 액자를 찾을 때 다른 완성된 액자들이 놓여 있는 것도 슬쩍 볼 수 있다. 공장의 규모가 커서 서울 수도권일대의 스튜디오들 액자를 취급하는데 완성된 액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최근의 트렌드를 엿볼 수 있었다. 1인 소상공인 자영업자가 시장조사를 하러 다닐 시간도 부족하기에 이렇게라도 그 결핍을 보충한다고 생각했다. 완성된 액자들 사이에서 내가 주문한 액자를 받아 사진관으로 출근한다. 가져온 액자는 사진관 한편에 걸어둔다. (원래 사진관에 샘플로 액자를 걸어두려면 손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런 경우는 손님이 곧 찾아가실걸 준비해 둔 것이기에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간의 전시가 되곤 한다)

역시 사진은 뽑아야 제맛, 그중에 선 크게 뽑아야 제맛, 게다가 아크릴액자는 사진이 더욱 화사해 보여서 만족도가 아주 높다.


화요일

점심시간이 지나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던 그때 잠을 깨워주는 딸랑 소리가 들렸다. 조건반사로 몸을 일으켜

"어서 오세요~"

하이고 아저씨께서 오셨다. 오늘은 점심시간에 조금 더 과음을 하신듯했다.

"액자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에 걸어놨습니다."

"사장님. 다 되면 연락을 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어제도 하루종일 연락을 기다렸다고요. 연락이 없어서 오늘 와본 거라고요. 왔다가 액자없으면 다리도 불편한 사람 똥개훈련 시킬라고 그럽니까?아니 왜 연락을 안 합니까?!"

"아니, 제가 월요일에 찾으러 오시면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월요일에 연락을 준다고 했지 언제 그랬어요?! 월요일 내내 기다렸단 말이요!"

(중략)

상대방의 알코올컨디션, 심적 흥분상태, 동어반복 지금 상황에선 그 어떤 말도 전달되지 않음을 감지한 나는 태세를 전환하기로 했다. 강경이냐 죄송이냐 뭐 답은 정해져 있지만... 결국 죄송 모드로 손님을 어르고 달래서 손님의 쌓인 감정을 나에게 모두 해소케 하고 돈을 받고 액자를 건네드리는 것이 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맨 정신이 아니었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때마침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미스터리 오 씨 아저씨(따뜻한 사진관 세 번째 이야기 참고)가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아저씨의 등장만으로 사진관 안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술기운을 빌려 나에게 감정해소를 퍼붓던 하이고 아저씨가 오 씨 아저씨의 기운에 압도된 듯 갑자기 술기운이 깨어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신비한 경험이었다. 하이고 아저씨는 서둘러 가게 문을 열고 절룩이며 나갔다. 오 씨 아저씨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고, 그간의 일을 설명드렸다.

"못난 인간이 어디 와서 술주정을 하고 갑질을 해. 저딴 인간은 손님으로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받아주지도 마!"



오후 5시

내 아버지도 술을 드시기 전과 후가 극과 극으로 다른 분이셨다. 여전히 사진관에 걸려있는 액자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접수증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사진관이에요. 액자를 안 가져가셔서 괜찮으시면 제가 댁으로 가져다 드려도 될까요?"

"됐수다."

"아깐 제가 정신이 없어서 당황했는데요. 아무래도 제가 직접 뵙고 사과도 좀 드리고.. 가는 길에 맥주 좀 사서 한잔 따라드리면서 이야기 좀 드릴게요"

'맥주'라는 단어의 등장과 함께 아저씨의 대화가 부드러워졌다. 참 그라데이션한 아저씨다.

[잠시 출장 중] 팻말을 붙여놓고 액자를 챙기고 슈퍼에서 맥주 세병과 새우깡을 한 봉지 사서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동사무소옆 6단지에 사시는 아저씨 댁 초인종을 누르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인상이 참 선해 보이는 아들이다. 아들을 보자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신 날은 조용히 눈치껏 아버지를 피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괜히 눈에 띄어 한바탕 잔소리와 훈육을 들어야 했고 그런 상황에 새어머니마저 가세하면 집안이 시끄러워지기에 그냥 방에서 조용히 있는 게 유일한 선택지였다.

식탁에 앉아있는 하이고 아저씨 건너편 의자에 앉아 맥주를 꺼내자 아들이 컵을 내어주었다.

맥주보시자 아저씨의 기분이 한결 편해 보였다. 한잔 따라드리면서

"아까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생각해 보니까 사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 건데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자 한잔 드시고 기분 푸셔요"

아버지는 내가 성인이 되기 전에 병원에 입원하셔서 대학을 입학했다는 소식도 듣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난 살아생전 아버지에게 술 한잔 따라드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적도 많지 않았다. 분명 그때의 내 아버지도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하이고 아저씨는 과거 중국집 사장님이셨다. 온화하고 유머러스했던 성격의 사장님은 그때는 다리도 멀쩡하셨다.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그때, 그날은 한국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고 사람들은 모두 티브이 앞에 모여있었다. 하필 그 시간에 배달이라니. 축구경기에 빠져있는 젊은 배달직원에게 차마 배달 가라고 말하기 미안했던 사장님은 당신이 철가방을 들고 나와 오토바이로 배달을 가셨다. 하필이면 그날이었다. 그날의 사고로 아저씨는 다리를 잃게 되었고 사장의 부재와 수술, 수술 후의 심리적인 문제까지 한순간에 벌어진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더 이상 가게를 운영할 수없었고 그렇게 가게를 헐값에 처분하고 아저씨는 집으로 들어오셨다. 육체적 심리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하루하루 술로 버틸 수밖에 없었고 점점 술에 의존하는 날들이 많아져가고 있었다. 성격은 점점 예민하고 거칠어졌다. 주위의 시선에 더욱더 행동도 과격해지고 남들이 보든 말든 아무 데서나 의족을 분리해서 쳐다보는 시선들에게 무언의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때 사진관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날 이후 하이고사장님은 사진관을 자주 찾아오셨다. 사진관을 찾을 때의 표정도 한결 밝아져 있었다. 사진관 앞에 내다 놓은 의자에서 신호대기를 위해 잠시 앉아있기보다는 사진관 안으로 들어오셔서 의자에 앉아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가신다. 늘 손에는 과일이나 간식을 담은 비닐봉지에서 한두 개씩 꺼내어주신다. 그리고 박 씨를 물어다 주는 제비처럼 손님들을 한 명 두 명 데리고 오셔서 소개해주셨다. 장애인협회 같은 모임이 있으셨는데 그곳에도 우리 사진관 홍보를 해주시고 카톡사진인화도 널리 전파해 주신 덕에 손님이 부쩍 늘어났다. 누군가는 진상손님이라 낙인찍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을 수도 있을 테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진심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자 손을 잡아주며 미소를 지으며 친구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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