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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역 근처 자그마한 일본식 주점에서 유메를 본 뒤로 시간이 꽤 흘렀다 당시의 대화는 흥미로우면서도 대양 건너에 있는 얘기를 듣는 것처럼 지루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녀가 말한 ‘무언가’라는 것에 유메 스스로도 이해를 하려고 노력했던 그리고 나도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파악하지도 알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가 재영 속 카타마리.. 그러니까..
유메는 손짓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에게 어떻게든 전달해 보겠다는 노력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이렇게 진실되게 전달할 만큼 그것이 중요한 것일까라고 물어보고 싶어 졌지만 애써 참았다 그녀의 전달에 방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나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게 명확하게 존재했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것들의 끈 혹은 선이 이어지는 것 자체가 나에게 좋은 작용을 할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다
cancer... 암? 그런.. 덩이 덩어리 같은 재영의 안에 있어요 그것이 당신을 괴롭히고 있어요
암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바로 아버지의 폐암으로 뉴런의 전달물체들이 기억을 연결 지어 주었다 나에게 암이 있다는 뜻인가 사실 아버지가 진단받은 폐암은 유전 같은 것이었나 아니 유메가 말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암을 말하는 것이 아닌 듯했다 추상적이었고 불투명했다 나에게 덩어리라는 그러니까 표현하기 어려워 유메의 모국어로 시작해 영어로 해석되고 이후 다시 한국말로 해석되어진 문자를 나에게 전달한 과정에서 그것이 꼭 생물학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덩어리 암 종괴 종양 나의 깊은 곳에 있는 그런 덩어리를 그녀는 어떻게 본 것일까 그런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속이 좋지 않아 졌다 더부룩해지는 느낌에 아버지는 폐암이지만 나는 위암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작년에 했던 내시경 검진에선 종양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작은 궤양들만 보인다고 얘기를 들었다 잦은 맥주섭취 때문이었을 것이라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 데에는 맥주를 먹기 위함도 있었기 때문이다 궤양정도는 살아가는 데 있는 얼굴에 생기는 잡티 정도이지 않을까 했다
집 소파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유메가 전달한 말을
내 깊은 곳 덩어리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하게 내가 보지 못하고 내가 느끼는 못하여도 나에겐 분명 그런 덩어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런 덩어리를 지닌 채 살아간다 나의 아버지처럼 폐암이라는 실존적 덩어리를 신체에 지니고 있을 수도 있고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고달픈 상처의 덩어리가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마음속 깊이 갈기갈기 찢어져 그것들이 서로 달라붙고 혈액과 혈청이 엉겨 붙어 생겨난 덩어리가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유메가 말한 것이 자체가 더욱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부정확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찰나의 그러니까 나의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 판단한 급조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성급하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일본인일지라도 그래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짙고 무거운 어둠이 나의 집 안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유메는 집에 잘 들어갔을까 그녀의 복장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나름 잘 어울리는 모습의 유메 일본인임에도 그녀는 무언가 한국적인 느낌이 존재했다 이국적인 느낌이 들고 이국사람이라고 해도 현재 현실에 당장 지금에 머무르고 있는 환경에 물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느낀 일본국적이면서 한국적인 느낌은 비단 특이적인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판사에서 일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책과 관련되어 일을 하기에 타국어임에도 많은 단어를 접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한국인과 대화를 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워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말투와 그녀의 조각들이 생각났다
키린 종종 등장하는 일본어 하이 이자카야 주인과 하는 일본적 제스처 –이를테면 같이 이자카야로 걸어갈 때 자주 손바닥을 펴 보이며 손짓으로 이쪽으로 오라는 식의 행동을 했다 그에 비해 한국 사람들은 제스처가 매우 적다- 그리고 말을 할 때나 안 할 때나 보이는 덧니 그리고 얼굴에 별자리처럼 수놓아진 많은 점들 어쩌면 다른 세상의 문이 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본 것은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전달자로서 역할을 자처한 것은 이전까지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곳을 나아가야만 하는 운명이지만 문제는 내 안에 있는 덩어리 그것을 해결해야만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나는 생각이 너무나도 많기에 익히도 나의 허무맹랑함을 알고 있다 생각이 생각을 물고 생각은 또 다른 고리를 만들어 수많은 것을 꿰고 다닌다 그렇게 또 새로운 생각을 생각했다 생각을 하다가 정리조차 못해 잠에 들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엔 ‘공상이 많아 창문 바깥을 항상 보고 있다’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초등학생임에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은 샘솟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나를 어느 곳으로도 데려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며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경험칙으로 유메와 관련된 그리고 유메가 알려준 내가 정확하게 모르는 나에 대한 생각이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안다 한들 그리고 모른다 한들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세상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은 중의적으로 청렴결백하다 어느 면에선 세상은 나뿐만이 아니고 나 이외의 수억 명의 사람이 구성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나의 존재가치는 그렇게 크지 않다 고로 유메가 말해준 내용은 세상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생각의 고리들이 이치가 맞는 듯 맞지 않는 듯했지만 그 마저도 생각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소파에 누워 아이보리 색 벽지에 걸린 아날로그 식 시계를 보았다 요즘엔 집에 시계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마 핸드폰의 보급정도가 유치원생까지 이르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 시계가 필요한 사람이다 현실감을 느끼기 위해 언제나 시계를 바라본다 시계 없이 시간의 흐름이 실제로 어떤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핸드폰에 떠있는 아라비아 숫자 네 개에선 어떤 현실감을 포착하기 힘들다 그래서 집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는 것으로 아직은 내가 현실에 잘 머무르고 있구나 하며 느낄 수 있다 토템과도 같은 것이다 시계를 바라보며 현실을 익혔다 아날로그 식 시계가 좋은 점은 무한함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초침은 바쁘게 움직인다 쉴 새 없이 그러나 분침과 시침은 초침에 비해 쉴 새 없어 보이지 않는다 초침 분침 시침과의 시간의 개념은 다르다 그러나 하나의 틀 안에서 서로를 보조하며 서로를 안내하며 서로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 준다 그런 일련의 행동들은 무자비하게도 배터리에 의존하지만 배터리가 계속해서 공급된다는 가정 하에 시계의 움직임은 분명 무한하다 그래서 시계를 한 없이 바라보게 된다 계속해서 돌아가는 무한한 시계 초침을 보다 분침을 보다 시침을 보다 보면 어느새 잠에 드는 것도 시계의 아주 큰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