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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 Oct 20. 2024

고리 15.

15     




 시계를 통하여 생각을 당당하게 몰아낸 듯 보였으나 역시나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도 업무에 지장가지 않을 토요일이었기에 망정이지 유메를 화요일이나 목요일에 만났더라면 수요일이나 금요일이 굉장하게 난처해질 수 있었다 –기린 나마비루는 정말 끝내주게 맛있던 이유도 있다 – 잠을 잘 자지 못한 탓에 정신 속에는 안개가 가득 끼었고 시계를 아무리 바라보아도 머리만 지끈지끈 아파왔다 머리의 무게가 실제로는 늘어나지 않겠지만 점점 부풀어 소파에 얹은머리를 들어내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어떤 것이든 해야 할 것 같아 몸을 일으키고 산세비에리아의 잎을 젖은 행주로 하나하나 닦아주었다 산세비에리아는 튼튼하고 단단해 보였다 잎에는 생명의 힘이 담긴 약간의 한기가 존재했고 손에 물이 묻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수증기 같은 느낌이 손에 남아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그래도 다섯 시간 정도 잔 것이라면 강렬한 생각이 유입된 것치곤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머리에 내려앉은 안개를 걷어내기로 했다 마치 누가 감시라도 하는 듯 집안을 조금 정리하는 척을 했다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던 책들은 책장 빈 곳에 대충 꽂아두었다 부엌으로 가서 물기가 다 마른 지 이틀정도 돼 보이는 하얀색 그릇과 빈티지 샵에서 구매했던 자기 잔들을 모두 상부장에 올려두었다 새벽이기에 청소기를 돌릴 수 없어 빗자루로 구석만 대충 쓸어 담았다 그리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새벽 다섯 시의 바깥은 나름 선선했다 굉음 같던 열대야의 밤이 물러간 듯했다 습도 높은 공기가 실내로 들어왔지만 확실히 바람의 결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몸을 쪄내 듯 고온고습의 바람과 다른 살결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가는 미온의 바람이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매미소리는 많이 잦아들었고 종종 들리긴 하지만 확실히 작아졌다 그리곤 귀뚜라미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분명 귀뚜라미 소리가 있었을 텐데 이제야 인지한 것일까 분명 이제는 여름의 뒷모습이 보인다 뒤를 돌아보니 가을이 걸어오고 있다 일련의 자연스러운 자연적 현상들만으로도 머릿속 안개가 걷히고 있음을 느꼈다 안개가 걷히는 만큼 다시 생각이 움직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유메 유메가 떠올랐다 그리고 덩어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를 떠나간 이 자리에서 같이 공존하던 우리의 한 축이었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의 행방여부가 사실 내 안의 덩어리와 관계가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유메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그러나 연락처를 알지도 못한다 그리고 유메를 사적으로 알기엔 리스크가 크다 나는 사내에서 어떤 사이에 얽히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연락처를 아는 대상은 팀장 말고는 없다 –다행히도 팀장은 남자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연락처를 알 필요가 없었다 일을 하는 데에는 텔레그램으로 연락이 충분했으며 사내 메신저도 존재했기에 굳이 더 나아갈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유메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강렬한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몸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식도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위액이 식도로 역류하는 느낌 그러나 방도가 없었다 그녀가 자주 가는 작은 일본인 이자카야 역시 새벽 다섯 시에 열고 영업을 할 리가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유메와 만났던 역사 출구였다 욕구가 나를 이곳까지 이르게 만든 것이었을까 분명히 나는 마지막 생각을 끝내고 당장 유메를 만날 방법이 없음으로 결론 지었지만 몸과 정신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더 깊은 무언가는 나를 자처하고 어떻게든 도달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 욕구는 유메와 사적으로 처음 만난 곳에서 다시 눈을 뜨게 했다 다행히도 핸드폰은 우측 앞주머니 지갑은 좌측 뒷주머니에 있었고 더 다행인 것은 무의식에 지배된 순간에도 옷을 적당히 차려입었다는 점이다 유메와 만났던 이곳에 도착한 이상 갈 곳은 한 곳이었다 그러나 나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리비도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분명히 새벽 다섯 시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어떤 이유로 이곳에 나를 둔 것이냐고 그러나 불평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생각한 것도 행동한 것도 자초한 것도 나 자신이니 그래서 유메가 손짓하며 따라오라고 했던 그곳 그곳을 향해 기억을 더듬으며 걸어 나아갔다 마곡역에서 성인의 걸음거리로 오 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번화가 치고는 중심보다는 벗어나 있는 가게지만 그렇다고 너무 멀리 위치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 주점의 음식과 맥주의 맛은 정말이지 일본이었다 오분 걸어가다 보니 멀리 보이는 기린 생맥주 간판이 보였다 그런데 기린맥주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설마 주인이 안 끄고 간 것이겠지 했으나 발걸음은 더욱더 확인하고 싶은 에너지로 솟구쳤다 리비도는 분명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 맞고 아무도 알 수 없을 만한 일도 이유가 있을 법한 일로 만들어버렸다 문 앞에 선 나는 당장이라도 집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고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여섯 시 십분 이자카야는 이 새벽 시간에 불이 켜져 있었다 너무나도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갈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유메와 대화를 했고 유메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정한 추측을 했다 불안정했지만 짙고 굳은 확신이 들었다 분명 이곳에 유메가 있을 것이다라고 그 확신과 더불어 가게는 분명하게 지금 시간에도 운영하는 모습이었다 기린맥주 노란색 간판의 등이 어스름하게 뜨고 있는 해와 함께 푸르스름한 새벽의 안내처였고 가게 정문의 창엔 주홍색 등 불빛이 산란되어 존재했다 환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는 정도의 밝기 나는 천천히 정문으로 도달하는 삐뚤빼뚤하고 어울리지 않는 돌계단 세 개를 하나씩 천천히 밟아 올라 문을 열었다 그 문을 열기까지 시간의 흐름은 분명 달라지는 듯했다 시계를 바라볼 때 초침과 시침에는 분명한 격차가 있는 것처럼 문에 도달하기 위해 첫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문의 손잡이를 잡고 밀어 여는데 까지 분명한 격차가 손과 발에 느껴졌다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가게 내부엔 한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음식의 냄새도 없었다 이 지역에 그리고 이 새벽에 밥을 먹으려는 사람이 적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이 가게 근방에는 술집이 많다기보다는 음식점이 많고 더 큰 반경 안에 나이트클럽이나 다른 유흥클럽이 존재하지 않아 상업 종사자들이 와 늦으면서도 이른 오묘한 시간대에 따스한 밥을 청할 사람 역시 없다는 것이다 미묘한 가스 열기 냄새는 있었다 아마 시사모를 굽기 위해 가스풍로를 쓴 탓이거나 혹은 가스가 조금은 새어 나오고 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가스향 보다 더 미묘하고 가지런한 여성의 향이 났다 내가 맡은 여성의 향이란 샴푸에 가까울 수도 있고 향수 혹은 특별히 아끼는 섬유유연제의 향일지도 나는 그 향에서 유메의 흔적을 찾으려 시도했다 나의 무의식 역시 유메의 흔적을 좇아 이곳으로 안내했을 것이고 안내를 받아 도착한 이곳에서 역시 유메의 느낌만을 쫓고 있었다 유메는 어디 있을까 먼저 유메와 왔을 당시를 생각해 보았다


  제일 아래의 돌은 길쭉하고 구멍이 숭숭 나있었다 제주도의 어느 오름에서 있을 법한 그러나 제주 오름에는 이렇게 기다랗고 가지런하고 단단한 현무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돌을 구하기 위해 과테말라 같은 화산지를 들렸을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혹은 일본에서 직접 구한 것은 아닐까 했다 두 번째 돌은 대리석에 가까웠다 그러나 대리석처럼 무거운 모습을 보이지만 미끄럽지 않도록 여러 군데를 일부러 파놓은 듯한 그러나 억지로 파낸 것이 아닌 스쳐가는 바람이나 빗방울에 의해 오랜 시간에 의해 파인 여러 굴곡이 있었다 그 돌은 생각보다 오래된 –상상하는 그 이상의- 건물의 정원을 이루고 있던 돌의 일부처럼 고대 로마문명을 떠올리게 하는 돌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돌계단은 첫 번째와 두 번째와 비교했을 때 비교적 평범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며 보일 그런 돌 돌의 재질을 오히려 알 수 없는 콘크리트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돌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돌을 지르밟아도 오히려 첫 번째나 두 번째 돌계단보다 먼저 부서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은 그런 강인함이 보이는 돌이었다 유메가 먼저 그다음차례로 내가 세 개의 계단을 밟고 문을 열어젖혔고 오후 식사시간대라 그런지 세 테이블에 손님이 있었다 다행히도 가게에는 네 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비어있는 식탁은 마치 유메가 이곳을 도착할 예정이기에 사장이 미리 자리를 빼어 놓았거나 유메가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해 예약이라도 해둔 것처럼 가지런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은 밀어 연 다음 한 잔의 물이 다 따라질 정도의 시간이 지나 문이 닫힌다 우리가 앉은자리는 닫힌 문의 왼쪽으로 몸을 틀어 도달할 수 있는 창가 자리였다 그 자리 엔 건물의 기둥을 숨긴 듯한 벽이 툭하고 튀어나와 있었다 유메는 그곳에 앉았다 항상 앉았을 자리 유메의 자리 나는 그 자리의 마주한 곳에 앉아있었고 우리는 치킨 가라아게와 기린 나마비루 두 개 그리고 가게 사장이 유메가 단골이었기에 내어준 에다마메 –푸른 완두콩 일본의 대표적인 술안주로 콩깍지 자체를 소금물에 삶아 한소끔 식힌 뒤 두세 개를 작은 그릇에 서빙해 주는 안주-를 먹으며 대화를 했다 나는 유메의 눈을 보며 대화했다 습관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말하는 것을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안의 덩어리 내 안에 존재하는 그런 암 같은 덩이 유메의 눈은 깊었다 눈이 큰 편은 아니었으나 옆으로 길게 늘어진 음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섬세했고 정확했다 눈에 담긴 눈동자는 진실을 깊이 말하는 사람의 눈빛이었고 어떤 면에선 애달팠고 강구하던 분위기가 풍겼다 왼쪽 눈가 밑에 작은 점 한 개 오른쪽 콧잔등에 작은 점 한 개 오른쪽 입 꼬리 위에 더 작은 점 한 개 왼쪽 뺨엔 정확히 동그랗고 살짝 부풀어 있는 다른 점들보다 옅은 색을 띤 점 한 개 마지막으로 오른쪽 귓불과 귓바퀴 그리고 이주에 매우 작으나 맑고 깊은 밤 안동에서 본 별같이 작고 빛나는 점 새 개가 있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순간에 집중을 하였으나 나의 집중력은 그녀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따라갈 수는 없었다 다시 집중을 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버는 사이 그녀의 점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점들을 보며 별자리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나 분명히 별자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점들을 하나씩 선을 그리듯 이어보았다 왼쪽 눈에서 시작해보기도 했고 왼쪽 뺨에서 시작해보기도 하고 왼쪽 이주에서 시작해보기도 했다 아무리 그려보아도 머리에 맺히는 별자리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으나 분명한 것은 점들이 이어진 다는 것이다 다른 위치에 있음에도 서로 다르다는 느낌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는 느낌을 분명하다는 느꼈다 서로 이어지는 것 그 형태는 절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경험이 더 쌓이고 평생 내가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고 해도 알 수 없는 그런 형태였다 뭉쳐져 보이지만 그녀의 이목구비가 있어 정확히 어떤 형상이 그려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정직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자신이 느낀 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안의 덩어리라는 무언가를 정확하게 실체화하여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기계를 분해하여 다시 역으로 조립하는 과정과 같게 느껴졌다 기계가 완전한 조립완료 상태에선 기구함과 복잡함을 알 수 없다 기계를 분해하여 본체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조각을 나열하여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기계에 대한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왜 이렇게 작동하는지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유메는 나에게 그런 과정을 선사했다 내 안에 있는 것에 대한 분해과정을 거치고 분해 후 나열했고 나열 후 다시 조립했다 유메는 그날 감색 바지와 푸른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좇아 기억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문을 열고 닫는 순간동안만의 시간이 필요했고 문이 닫힐 동안의 시간을 이용했을 뿐이다 문은 닫혔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건물을 지탱하고 있을 기둥을 가려놓은 커다란 코너벽이 있었고 그 옆으로 유메와 내가 앉았던 자리가 보였다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작은 여성의 손 손을 따라 팔로 눈이 향했고 오른쪽 팔에 있는 불 주사 자국과 그 옆에 커다랗고 작은 럭비공 같은 점을 보곤 혼란스러워졌다 분명히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여성의 벗은 몸에서 보았던 점이었다 여성의 점 여성의 몸 나는 이 럭비공의 형태를 사랑했었다 럭비공같이 타원형이지만 조금 더 날카롭게 생긴 점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점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눈을 점점 더 올라가기 어려웠다 그래도 누군지 확인해야만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팔을 따라 점점 고개를 들어 목을 타고 올라갔고 목선을 타고 올라가 어스름한 빛을 머금고 있는 잔털을 보았고 묶여 있는 것으로 예측되는 갈색 머리카락을 따라 올라가니 얼굴이 보였다      


유메가 아니다


유메를 쫓았지만

유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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