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위치
사람은 물리적이다. 인체는 과학적으로 분석되어 있다. 얼굴. 피부. 귀. 배꼽. 발가락. 털. 샅샅히 파해쳐져 모든 이해를 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이라는, 인간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생활한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것. 그것도 사람에 속한 것이니 물리적인 법칙에 따르는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리다. 마음. 누군가에겐 마음이라는 것이 심장일 수 있다. 심장은 분명 흉골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물론 오른쪽에 존재하는 이도 있다. 어쨌든 인체 내에 속한다.
그리고 마음을 심장이 아닌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그 방향에 속한다. 마음은 국한된, 국지적인 표현이라기 보단 뭐랄까. 너무나도 심도 있고 비과학적이며 비물리적이다. 비현대적이라고 해도 될법하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의 존재여부는 과학자도 물리학자도 철학자도 저명한 비평가도 저널리스트도 부패한 정치인들도 인정할 것이다.
비록 현대적이지 못하고 과학적이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마음은 사람을 움직이는 근원지이다. 지진이 일어났다면 진원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과학자로서 어떤 발견을 하기 위해서 마음이 이끄는 어떤 주제가 있기 마련이다. 철학자도 자신이 가장 중요시하는 어떤 것에 마음을 쏟아 붓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비록 비현대적이고 구식일지라도 분명하게 존재하고 모두 사용하고 모두 존중하는 어떤 존재라는 것엔 부정할 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 마음의 위치를 살펴보려 한다. 마음의 위치? 신체상으로의 위치가 아니라 현재.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갠다 했을 때 하나의 초에 존재하는 마음의 위치 말이다.
마음의 위치가 정말로 중요하다. 마음의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뀐다고 생각한다.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그것이 증명된다. 심리학자였던 프랭클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충격 무력감 해방감 이탈 등 수많은 감정들을 써냈다. 정말 죽음의 늪에 잠긴 생활을 심리적으로 상세히 써두었다.
책에서 깊게 빠져들어 읽은 부분은 비록 죽음의 수용소 안에 있을지라도 사랑으로서 자신은 다른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겨울날 발이 퉁퉁 붓고 동상의 반복으로 무감각하다. 그 발로 구두를 신는다. 다 얼어버린 손과 곡괭이. 그리고 더 얼어버린 땅을 파낸다. 그 고통을 우리가 글로 본다 한들 느낄 수 있을까. 전혀. 그 고통의 고통의 고통 속에서 프랭클은 아내를 생각한다. 아내와 대화한다. 자신의 의식을 옆 수용소에 있는 아내 앞으로 옮겨간다. 프랭클은 아내의 생사조차 모르지만 마음의 위치를 옮겨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희망을 찾는다.
마음의 위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그 위치는 알아낼 수 없다. 노벨물리학상이 100회 이상 수상된대도 마음의 위치는 물리적으로 알아낼 수 없다. 현대시대가 초 고도화되고 모든 사람이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일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간대도 마음의 위치는 아무도 규정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위치는 어떻게 알 수 있냐.
그것은 단순히 자신만이 안다.
내 마음의 위치가 저 산너머에 있던.
실제로 산을 바라보고 그 위로 지는 해를 보고 있다면 마음은 그곳에 있는 것이다.
마음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이겨내든 져버리든 포기하든 다시 일어나든.
자신이 가진 마음의 위치를 스스로 정할 뿐이다.
그 일련의 과정으로 생기는 물집과 화농.
그리고 환희와 슬픔 모두 자신이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더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한편으론 축복이고.
한편으론 저주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침엔 수영 점심엔 일
저녁에 또 운동 그리고 집안일
아이를 위한 책 읽기
그리고
자기 전 쓰는 글
모두 내 마음의 위치를 스스로 결정했다.
스스로 결정한 오늘 하루 나의 마음의 위치를 돌아보니 나쁘진 않다.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이 또한 조그마한 행복을 위해
나의 소중한 일상을 위해 마음의 위치를 알고 위치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