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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 슬픈 이태원 유래

태생부터가 숙명적인 이태원…

by DKNY JD



'이태원’의 한자 표기는 '梨泰院'이다.


지식백과 둥에 따르몀 배나무가 마치 큰 정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조선시대 중 후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異胎院'이라는 한자의 슬픈 지명이었다.


왜 슬픈 것일 까?


임진왜란 이후라는 표현이 이 땅의 슬픈 역사를 이 이태원은 잉태하고 있다는 뭔가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이 처음 주둔한 곳이 지금의 이태원이었다.


주둔군의 만행 중 가장 악랄한 것을 떠올린다면 무엇 일 까?


눈물 나는 표현이지만, 점령군의 점유물 가운데 으뜸은 ‘겁탈’이다. 당시 왜군이 점령했을 때는 대다수 여성들이 피난을 간 지라, 그 대상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극소수의 여자와 당시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었다.


슬픈 역사의 기록이 엄연히 존재해서 하는 말이다.


왜군들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살라 버렸다.


문제는 왜군이 도망가고 나서다. 왜군들의 아이를 잉태한 비구니들과 미처 피난 못 간 여인들로 인해 졸지에 ‘사생아 타운’ 이 되고 만 것이다.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흔히 표현하는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사견이다.


비구니 되겠다고 집 떠났지, 생활터전인 운정사도 소실됐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동병상련의 사생아 잉태 여성들끼리 움막을 짓고 모여서 살았는데 당시 백성들은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 하여 이태원異胎圓(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며, 이들을 쑤군덕거림의 이바구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겁탈’이라는 단어는 삭제한 채, 왜군의 씨를 잉태한 화냥년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냉대한 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전국에서 성폭행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 거기다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까지 가세, ‘이방인 공동체를’가 태동된 것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 그리고 동국여지비고가 출처다.


여기에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던 갈 곳 없는 한국 여인과 그 자식들까지 가세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선조(임진왜란)와 인조( 병자호란) 후에 효종이 지명이 적절치 않다며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이태원 (梨泰院)으로 개명해 현재의 이태원이 된 것이다


이태원은 태생부터가 국제적이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도 희한하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 속에서 아니, 현재까지 ‘이방인의 땅’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이어 일제강점기엔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로, 그 이전 조선 말기에는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군사들의 주둔지로,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한 이래 근세에는 실질적인 주인은 대한민국 , 실질적 운영국가는 미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태원은 음식점( 특히 다양한 국가의 음식 전시장) , 술집, 보세 물건 상점, 심지어 기지촌 등등 거의 모든 상권을 미군이 주도해 왔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오늘날의 이태원은 한국 글로벌화의 중심지이다.


클럽으로 대변되는 유흥, 다수의 각국 대사관 또는 대사관저 소재지, 군인 및 외국인 전용 주거시설, 심지어 용와대로 불리우는 대통령실이 이웃으로 이전해 오는 등 신용산 시대의 메카인 것이다.


‘한국 속의 외국’이라는 이태원의 태생적 비극을 들어서 인지, 이태원 하니까 왠지 이방인의 느낌마저 든다. 아마도 태생적 아픈 역사가 계속 오버랩되어서 인 것 같다.


굴곡진 이태원이 작금의 아픔을 빨리 씻어내고 코어 글로벌 지역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제기하라, 이태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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