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 채울 필요는 없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페이지를 채우는 일보다 그것을 덜어내고 깎고 다듬는 작업이 훨씬 더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글뿐만 아니라 창작의 많은 부분이 그렇다. 사진이나 그림에도 너무 많은 것을 채워 넣으려 하다 보면 내가 담고픈 핵심을 잃어버리기 쉽다.
내 청춘의 밥벌이였던 인테리어 디자인도, 이것저것 너무 많은 마감재를 쓰거나 빈틈없이 가구를 채워 넣는 여백 없는 디자인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클라이언트에게 무언가 고민했다는 그럴싸한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 복잡한 디자인을 하게 될 때가 많은데, 그 사이의 협의점을 찾는 것에 꽤나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디자이너는 최소한의 공간을 적당히 채워 넣어야 그 공간의 주인이 온전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노랫말이나 시가 쉬운 듯 쉽지 않은 것도 잡화점의 진열 상품처럼 나는 늘어놓을 테니 너는 필요한 걸 골라 가져가렴! 하는 마음으로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 짧은 문장과 단어 속에 많은 의미를 담고 공감까지 끌어내야 함이 고난도의 기술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화자의 이야기를 청자의 입장에서 듣고 해석하며 비어있는 부분에 그들의 감정과 추억을 섞어 “나의 인생곡”으로 만들 수 있는 노래가 명곡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나는 아이유의 [아이와 나의 바다]라는 곡을 좋아하는데 노래 시작 부분 “그러나”를 들으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밀려오곤 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연결하는 어찌 보면 하찮은 부사일 뿐이었던 단어가 문장의 맨 앞에 들어가면서 그 이전의 수많은 감정들이, 순간 교차하고 부서지고 만나고 사라지며 가슴을 때리는 울림을 느낀다.
이처럼 때로는 구구절절한 긴 문장보다 하나의 단어에서 더 큰 감동을 받기도 한다.
창작의 영역뿐 아니라 인생의 많은 부분도 그렇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빼곡히 채워 넣어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미숙하게 그냥 그대로도 괜찮다.
사람들은 단지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서 꾸미고 치장하며 나 자신을 부풀려 포장할 때도 있고, 나의 채워지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때론 감추려 온갖 거짓말과 감언이설로 자기 자신마저 속이려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껏 살면서 느꼈던 건, 완벽하지 않음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고 완벽해 보이던 사람이 어딘가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면 경계하고 닫혀있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리기도 하고, 무언가 많이 가지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결핍이 있는 사람을 만나 그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면서 나 또한 함께 채워짐을 느낄 때도 때론 있었다.
비워내야 채울 수 있다. 생각도 그렇고 기억도 그렇다.
머릿속의 많은 부분이 부정적인 감정이나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면, [굳이] 한 번쯤은 비워 낼 필요가 있다.
마치 [혹시 몰라] 켜켜이 묵혀놓고 쌓아 놓는 짐처럼, 생각 버리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애써] 한 번씩 덜어낼 필요가 있다.
내 인생에서 어떤 부분을 덜어내고 깎아내면 좋을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