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무표정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 둘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A. “야 넌 뭘 그딴 걸 먹고 있냐”
B. “어? 취향 존중 안 해주네”
A. “그러네 나 쓰레기야”
B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맞받아치는 공격도 하지 않으면서 덤덤하게 자기 마음을 표현했고, A도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깍듯하게 사과하지는 않았어도 자기를 비하하는 농담 안에 언 듯 미안한 마음을 내 비치며 분위기를 풀었고 아무렇지 않게 상황은 종료됐다.
순간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감동이 밀려왔다.
‘뭐지 요즘 아이들이 똑똑한 건 알았지만, 제법인데?!‘
예전에 읽었던 자기 계발서에서 개그우먼 김숙 님의 대처능력을 좋은 예로 들어준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선 넘는 말을 한 상대에게 웃거나 화내거나 하는 표정의 변화 없이 “어? 상처 주네.”라는 말로 마음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책을 읽을 당시에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꼭 써먹어봐야지!'라고 되새겼음에도 막상 상황에 닥치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나쁜 것], 부모로부터의 외면과 비난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 버려짐에 대한 나의 불안을 크게 증폭시키는 위험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폭력이 난무한 불안전하고 위태로움 가득한 가정이었기에, 부정의 감정뿐만 아니라 긍정의 감정조차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곳이기는 했다.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덤덤한 척 담아두곤 치료방법을 몰라 곪게 만들고 상처 내며 나 자신을 학대하는 방법밖엔 알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이가 징징거리거나 울 때면 참을 수 없는 큰 분노가 밀려오곤 했는데 아마도 그때의 내 모습이 투영되어서가 아니었을까.
타인에게서 농담과 웃음을 가장한 수동공격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이들은 곧바로 상대방의 약점과 상처를 헤집어 꺼내어 반격에 들어간다. 물리적 폭력과 정서적 폭력, 어느 쪽이든 상대가 행하는 대로 맞고만 있는 것은 해결책도 좋은 방법도 아니다.
그러나 똑같은 방법으로 받아치는 것은 “싸우자! 갈 때까지 가보자!”며 도전장을 내미는 행위로 내가 가진 과거의 상처로 인해 현재의 다른 누군가와 또 다른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거다.
그것은 본인에게도 엄청난 에너지의 상실로 이어지며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를 낳고 또한 그 싸움을 지켜보는 주변인들 조차 어색함 속 눈치를 봐야 하는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렇게 오랫동안 풀지 못하고 담아두며 곪게 만든 상처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정도 사회생활의 경력이 쌓인 20대 후반-30대 초반 무렵엔 누군가 나에게 무례하거나 공격을 가했을 때 참거나 에둘러 표현하지 못하고 뾰족하게 날을 세워 큰 소리로 반격했을 때가 있었다. '가만히 참기만 하니까 나를 가마니로 보나! 응!?'이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응징했던 때가.
어리고 미성숙했던 부끄러운 모습이었음을 지금은 반성한다.
그 결과 또한 좋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무례한 말로 선을 넘는 최초의 가해자 보다 큰소리로 반격한 피해자에게 초점이 맞춰지며 [감정조절이 미숙한 사람]이나 최소 가해자와 똑같은 사람으로 낙인찍히니 말이다. 또 그러한 분노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영양 가득한 좋은 먹잇감이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렇게 억지로 참고 억압하며 눌러놨던 많은 것들은, 언제가 되었든 터지고 폭발하기 마련이므로 건강하게 표현해야만 한다. 길고 장황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단순할수록 좋다.
몇 초간의 침묵이 되었든, [상처 주네][맘 상하네] 같은 간결한 자기감정 그대로의 표현이 되었든, 눈치 더럽게 없는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의 말이나 미안함을 표현하지 않거나, 오히려 그 정도의 농담도 이해 못 한다며 상대를 속 좁은 어리굴젓 취급한다던지, 너의 그 감정은 잘못된 거야, 예민한 거야, 왜 그렇게 받아들여?라는 적반하장으로 나오며 가스라이팅 한다면 차라리 거리를 두는 편이 낫다.
인간의 [감정]은 옳고 그름의 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 한 사람은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고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가 없듯,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개인적인 영역이며 그 감정 자체를 비난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질투나 분노, 서운함등의 감정으로 타인을 공격하고 파괴시키려는 행위 [학교폭력, 왕따, 태움]등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므로 틀린 게 맞고, 감정 자체를 통제하려는 것도 일종의 정신적 폭력이므로 틀린 게 맞다.
[나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았다면 내 의도가 그렇지 않았더라도 일단은 사과하고 받아들이자. 미안함과 공감의 감정에는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단, 상대의 심리를 조종해 우위에 서려는 나르시시스트나 소시오패스일 경우엔 손해라고 느끼겠지만]
내가 사과할 수 있어야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도 표현할 수 있다. 사과하지 않는 것은 자존심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자신은 시시때때로 서운함이나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상대의 감정은 사사롭게 여기고 얕잡아 보는 내로남불의 아이콘들을 자주 마주 하곤 하는데 참으로 하찮은 인간상이다.
절대적 악이나 선의 개념이라기보다 단지 [내 마음]이 불편하고 낮아지게 만드는 사람에게서 나를 분리하고 지켜 내라는 거다.
그도 누군가에게는 예의와 격식을 차린 [좋은 사람] 일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나에게는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인간유형일 뿐이니까.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그에게 내 영역 침범을 가만히 두고 볼 것인가, 얌전히 다리를 접도록 방법을 알려줄 것인가, 더욱 널브러져 편안히 누울 수 있도록 그 앞자리를 아예 비워드릴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온전한 당신의 몫이다.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지키는 법도 알아야만 한다. 나는 좋은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표현하는 최소한의 감정조차 그들에겐 공격의 어감으로만 받아들여진다면 그 사람과 나는 개와 고양이처럼 언어가 맞지 않는 사람인 거다.
고양이는 친근함과 편안함의 표시로 그르렁 거렸을 뿐인데, 개는 위협과 경계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공격한다면 그 둘은 결코 좋은 관계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남녀 사이든, 친구의 관계든 동등하지 않게 이미 갑과 을의 위치가 생겨버린 듯하다면 그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고 정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초등생들도 알고 있는 걸 이제야 알았지만, 이제라도 안 것이 어디냐며, 스스로를 토닥여본다.
나는 너의 취향을 존중한단다
너도 좀, 그래주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