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변곡점
비교적 안전하지 않았던 가정에서 전혀 아름답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낸 나의 유일한 안식처 겸 도피처는 “상상”이었다.
요즘처럼 컴퓨터나 스마트 폰이 존재했던 시절도 아니었고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늦게까지 TV나 라디오를 틀어 놓기에는 마당건너편 주인집에 세 들어 사는 쪽방의 좁디좁은 방 한 칸이었기에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방에 누우면 머릿속에선 마치 장편 드라마처럼, 현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진다. 상상을 하다 잠이 들거나, 잠시 무언가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리모컨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췄다가 다시 상상을 이어가곤 했다.
그렇다고 엄청 화려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평생이래 봐야 10년 남짓 살았던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상상이래 봤자 한계치가 있었으리라.
TV에 나오는 연예인과 데이트 비슷한 걸 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두근두근 설레는 뭐 그런 거였을까. 사랑은 본능인 거라 그랬는지 해보거나 받아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디폴트 값이 있었나 보다.
아마도 언제 와장창 깨어질지 모르는, 불안하디 불안한 환경 속에서 그 상상이라는 현실도피가 생존본능처럼 나를 지켜내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 이후 청소년기가 되었을 땐 그나마 작은 내방 한 칸을 갖게 되었고 카세트테이프가 플레이되는 작은 라디오도 하나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를 들으며 그를 우상화시켰고 내 마음의 안식을 얻고 도피처로 삼았다.
그 무렵엔 쎄씨, 키키, 에꼴 같은 패션잡지나 보물섬 같은 만화잡지가 유행했는데 잡지 맨 마지막 즈음 “펜팔 해요” 페이지에 내 글과 주소가 실리면서 꽤나 많은 편지를 받고 하루 3~7통의 답장을 쓰기도 했던 것 같다. 처음엔 한 장을 채우기도 어려웠던 편지를 쓰면 쓸수록 2장, 3장.. 6,7장을 채워내는 것도 우스워졌다.
그렇게 상상을 하고, 외톨이로 지낸 내 곁의 유일한 친구였던 책을 일주일에 두세 권씩 읽어대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해 편지 글로 옮기면서 그나마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그 무렵 작가의 꿈을 살며시 꾸었던 것 같다. 학교에 존경할만한 국어 선생님이 계셨던 것도 한몫했고 그렇게 되고 싶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가고 싶다는.. 태어나 처음으로 가졌었던 나의 꿈.
그러나 “작가 돼서 뭐 먹고살래?”라는 모친의 말 한마디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바로 수긍하고 실업계고 디자인과, 전문대 실내건축과를 졸업하곤 박봉에 야근에 철야를 밥 먹듯 하는 인테리어 회사에 취직해 같은 직종으로 이직해 가며 10년 넘게 내 청춘의 밥벌이로 삼았다.
작가나, 설계나 먹고사는 거야 비슷비슷한 식당 밥이었을 것 같은데 하고 싶은 걸 했었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아무튼, 밥벌이를 하는 어른이 되고 드라마보다 더 한 진짜 현실을 살아내야 했을 때는 더 이상 상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못했던 것 같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가면서 짝사랑이 아닌 진짜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고, 더 이상 상상이 필요 없어졌단 게 더 맞는 말일까. 그 4년간의 사랑이 나의 젊은 날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으나 어찌 보면 그가 내 불안하던 청춘의 도피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젠 40대, 나는 그저 흔들리던 불안정한 청춘에서 그대로 나이만 먹었고, 또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면 뭔가 없던 힘도 생기고 좀 더 굳건해질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인생의 도피처나 찾고 있는 그냥 불안정한 엄마다.
이젠 어릴 적 내 꿈을 도피처로 삼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꾸준히 해 왔던 일이 아니라서 서투르고 어색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서툰 한걸음을 내디뎌볼까 한다.
처음인데 서투르면 어떻고 넘어지면 어때. 우습고 만만하게 보면서 허투루 하지만 않으면 되지.
진심을 다하면 되잖아.
완벽하지도 않으면서 소심한 완벽주의나 강박으로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내 꿈을 이젠 조심스럽게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