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틀리지 않았다.
착하다는 말을 싫어했을 때가 있었다.
“착하다”라는 프레임을 자기들 마음대로 씌워 놓고선 그들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좌지우지하려는 느낌인 것 같아서.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존재하긴 했었고. ‘넌 착하지 않으면 안 돼. 내 말은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하고 내가 어떠한 무례한 말과 행동으로 선을 넘어도 하하하고 웃어 주어야 만 해’라는, 마치 해리포터의 [Impedimenta(임페디멘타) : 상대방을 일시적으로 막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고 또 느리게 움직이도록 할 수 있음] 마법의 주문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요즘 세상에 착하다는 말은 바보 같다. 실속을 챙기지 못한다. 계산적이지 못 하다는 말과 동의어인 것만 같아서.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 역시도 어떤 새로운 사람을 알았을 때 “어, 그 사람 착해.”, “진짜 착해 보여.”라는 말들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혹여나 나와 같은 맘일까 봐, 당사자에게 쓰는 건 지양하고 있지만.
그래서 내가 말했던 그 착하다는 의미는 뭐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으로 인해, 새로운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공포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겠다. 그 새로운 것은 환경일 수도 물체일 수도 사람일 수도 있겠고 그 대상이 나를 헤치지는 않을지, 상처 주거나 배신하지는 않을지에 대한 검증을 하기 위해 그 상대를 탐색한다.
탐색의 활용 자료로 혈액형별 성격이라든가 별자리성격, 심리학, 사주오행, 샤머니즘, 최근에는 16가지 유형으로 나눈 MBTI까지 활용되기도 하는 것 같다.
시대가 변하면서 자료의 내용만 변하고 진화했을 뿐 오래전부터 꾸준히 사람들이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나 스스로를 방어하고 지키기 위해 나 자신을 알고, 또한 상대를 알아야 한다는 관념이 컸으리라.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이상주의적 사고를 추구하며(동의어로는:현실적이지 못함) 상대방을 찌르는 창을 가지지 못한 나에게 있어서는 공격을 막는 방패를 좀 더 단단하고 견고하고 굳건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 수단으로 본능적으로 인간에 대해 탐구하게 됐던 것 같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았을 때, 공감받지 못했을 때, 반대의견으로 공격받았다고 느꼈을 때 “A형이라서 소심하고 이해심이 없구나?”, “겨울에 태어나서 사람이 따뜻하지 못하고 참 차갑네”, 최근에는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한 표현 “너 T야?!”라는 등의 일반화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진실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듯하다.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너의 그 좁디좁고 유하지 못한 성격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으니 나의 간접공격을 받아라- 하는 마음으로 던지는 참 하찮은 말들.
어쨌든 그러한 탐색을 모두 끝내고 ‘그 사람은 최소한 나를 헤치거나 이용하며 다른 마음을 품지는 않을 공격성이 덜 한 사람이다’라는 검증을 마쳤을 때, 확신의 도장을 찍듯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
“그 사람 인상 참 좋아 보여, 되게 착해.”
그러한 생각에 닿았을 때
“착하다”는 말을 이제는 그다지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무해한 사람. 무례하거나 공격적이지 않고 누군가를 품어 줄 수 있는 아우라를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착한 사람”으로 정의 내리기로 했다. 그런 착함을 이용하는 사람이 나쁜 것이지 착한 사람이 잘못되거나 틀린 것은 아니므로 착함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나의 친절함과 착함은 받을만한 사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고, 여전히 “착하다”라는 말을 타인에게 직접 쓰는 것은 지양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