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을 맞지 않은 아이
어린 시절 부모와의 애착이 결여되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행복해도 그 행복이 온전히 와닿지 않고 슬픔을 견딜 수 있는 백신을 맞지 않은 것과도 같다.
작년 언젠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찾았던 도서관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썸머님의 [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 ; 나르시시스트 엄마에게 고통받는 딸들을 위한 정서적 독립 프로젝트]를 우연히 꺼내 들었고 앉은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어 내려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
풀지 못했던 평생의 숙제를 드디어 풀어낸 듯했고 해방감을 느끼는 동시에 허무함이 몰려왔다.
나의 모친은 나르시시스트 엄마였다. 여느 엄마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었고 사랑을 주지 않는 모친에게 사랑을 받아보려 무던히 애써 보기도 했었으나 그 책을 본 후, 자기애성 인격장애에 대해 공부하며 많은 의문들이 풀렸고 많은 것들이 정리되었다.
내 탓이라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내 탓이 아니었단 걸.. 이제야 알게 되었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허허 웃으며 예쁘다고 말해주는 남편의 덕분이기도 하지만, 주변을 비워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몇 년간 가지면서 나에 대한 혐오를 멈추고 자존감이라는 걸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나 엄마에게 단 한 번의 칭찬도 들어보지 못했던 내가 유일하게 들었던 칭찬은 “여금이는 다른 건 몰라도 허튼데 돈 안 써서 착해 “ 약 10년 전 결혼을 준비하며 단 한 푼의 도움도 받지 않았고 그동안 내가 모은 돈으로 결혼했을 때 친척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오래된 빌라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나에게 오히려 오빠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옷이나 선물을 해야 한다며 400만 원을 가져가셨고, 손 벌렸다 한들 돌아오는 건 없을 거라는 것을 어릴 적부터 당연스레 인지하며 박봉의 돈을 차곡차곡 모아 왔었다.
평생 나도 가져보지 못했던 300만 원 넘는 명품백을 안겨드리고 와서였을까. 그 말을 들으면서도 참 허탈했다. 평생 자식에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칭찬이 돈이라니.
그러면서도 예전에 내가 드렸던 많은 것들, 비싼 선물이나 여행, 1년 넘게 드렸던 내 모든 월급 등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셨다. 네가 언제 그런 걸 줬느냐고, 기억도 안나는 얘기로 무슨 유세를 떨고 있느냐고.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태어나서는 안 됐었던 존재라 자연스럽게 인식하며 자랐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아주 어릴 적부터
“쟤네 아빠랑 이혼하려던 참에 쟤 임신하는 바람에 못 헤어졌어.”
”쟤 안 낳으려다 낳아가지고.. 큰애랑 5살 차이 나잖아”
“너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해서 다리가 계속 아프다” 언제나 모든 것은 내 탓이었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헤어지지 못한 것도, 다리가 아픈 것도. 모든 것이 나만 없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런 내가 자존감이란 게 생긴 단 게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까. 쓸모없고 나약하기만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그게 바로 나였다.
성인이 된 후 엄마에게 어릴 적 살던 동네 얘기를 스치듯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일이나 동네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너무 힘들었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고작 7-10살의 힘없는 어린아이였어.. 칼 들고 쫓아오던 아버지에게서 도망가던 우리의 모습이, 엄마를 때릴 때면 이불 뒤집어쓰고 울기만 했던 내 모습이 잊히지 않아.. 왜 엄마는 나의 감정 따윈 헤아려주지 않는 거야. 나는 과연 그때가 행복하고 즐거웠을까 ‘ 그렇게 속으로 되뇌어야만 했다. 이미 일곱 살에 알아버린 세상에 대한 무기력함이란.. 고등학교 1학년 무렵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평생 우울증을 달고 살았다.
나는 항상 엄마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이해하며 보듬어주는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여야만 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우연히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진단명을 알게 되었고 어릴 적 내가 가졌던 증상이 그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너는 무슨 어린애가 부처님처럼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렇게 얌전히 앉아있냐는 말을 할머니댁에 가면 꼭 들었던 것 같다.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감당하기에 힘들었으면 말문을 꽉 닫아버린 거였을까. 그런 것 따윈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냥 이상한 아이, 아무리 아픈 말을 던져도 묵묵히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아이였기에 엄마는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통화를 하면서 내가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데도 스스럼없이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곤 했다.
또래의 사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자기 자식을 남들 앞에서 비난하지 않고 편들어주기 바빴는데 특이하게도 우리 엄마는 나를 앞장서서 비난했고 누구도 어린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사촌이 나를 싫다고 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전달하며 이간질했고 누구라도 내 편을 들어줄라 치면 그게 아니라고 다시 한번 더 깎아내릴 뿐이었다. 고작 열 살 안팎의 그 어린아이를.
그래서 나는 내가 흠잡을 곳 많은 이상하고 나쁜 아이인 줄만 알고 컸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비아냥거림과 조롱에도 화내지 못하거나 웃어넘기는 법을 학습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는 나를 지키기 위해 오히려 뾰족하게 날을 세웠을 때도 있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도 의심부터 들었다. ‘나를? 왜 나를? 무슨 생각인거지 대체..’ 나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랑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 그런 나를 좋다고 하는 사람은 분명히 무언가 꿍꿍이가 있거나 그도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괜찮고 좋은,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은 쳐내고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들, 엄마나 아빠처럼 나를 대하는 그런 사람들로 내 주위를 채웠다. 그게 오히려 편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상한 건지도 몰랐다.
TV에 나오던 예쁜 아이돌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때 그 아이들이 부모와의 사이에서 나처럼 백신을 맞지 못했음을 직감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평생 단 한 번도 키워주지 않았음에도 보험금을 노리고 찾아오거나,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 이유를 불문하고 자신의 탓을 하기 마련인데 애정이라곤 전혀 담기지 않은 공허한 눈빛으로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그 죄의식을 전가하며 이미 고인이 된 자기 자식마저 욕되게 하는 것을 보며 저 엄마 때문이었구나.. 를 확실히 느꼈다.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엄마라는 것을.
보통의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엄마에 대한 마음을 이해하고 더 큰 고마움을 느낀다고 하던데, 나는 아이를 낳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음을. 본인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만만한 나에게 쏟아내고 자신의 죄책감이나 불안등을 나에게 투사했음을. 사랑하지 않는 자식을 키워준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많은 것을 받음에도 고마움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고 바로 잊을 수 있었다는 것을.
오빠가 준 10만 원에는 그렇게 기뻐하고 자랑을 해대곤 했었다. 결혼식 비용이나 예물, 오빠가 진 빚, 집도 아낌없이 내어주었고 조카들도 키워주었음에도 아까워하거나 바라지 않았다.
[아이]는 부모에게 무언가 보답해야 하는 존재가 아님을 나는 아이를 낳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존재 그 자체로 기쁨이고 행복인 것을. 나는 못 먹고 못 입더라도 아이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을.
한 번도 나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지 않았던 엄마.
어느 날 나는 “야, 너”라는 호칭에 자연스레 대답하고 있는 내 모습이 갑자기 한심스러워져서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다음 돌아왔던 건 “어이”였다. 아이 엄마까지 된 나에게.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에 “엄마는 딸을 왜 그렇게 불러?”라는 물음에 돌아온 답변은 마치 확인 사살을 위해 쏜 총탄과도 같았다.
“습관이 돼서…”
어느 날 부동산에 갔다가 옆에 앉은 모녀의 대화에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삼켰다.
”지희야, 우리 어제남은 국에다 밥 비벼먹을까? “
”그래 좋아 “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대화였는데 나는 그런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을 가면 자연스레 자신보다 딸들과 손주들의 선물을 챙기던 이모들의 모습과 다르던 엄마가 이제는 왜 그랬는지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나는 여행에서 그렇게 이모들이 자식들을 챙기듯 엄마의 선물을 챙겼다. 그래야 하는 줄만 알았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상처받은, 모든 것을 희생해서 나를 키워내신 분이니까. 물론 지금은 기억도 못하실 그 선물들을..
엄마에 대해 깨닫게 되면서 내 주변에 생각보다 훨씬 더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내 자존감을 갉아먹고 흡혈하여 본인들의 자존감을 채웠던 인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되었기에 나는 무엇이 잘못된지도 모른 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그들에게 끊임없이 직접 내 피를 수혈했다.
깎아내리면 깎아내리는 대로 그래 그렇지 하며 수긍하고 스스로 더 크게 바짝 낮추었다. 먹잇감을 찾는 그들에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겠는가. 나중에는 단 하나뿐인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던 그녀마저 나를 그렇게 대했다.
차곡차곡 쌓여있던 나에 대한 시기심을 그렇게 가감 없이 표출하고 내편인척 생각해 주는 척 이간질을 해댔으며, 깎아내리는 건 기본이었고 내 애인이나 남편에게 질투심까지 유발하면서 나의 행복에 크나큰 분노를 터트리는 모습을 보곤 그렇게 견디고 버텼던 20년 넘는 우정을 결국 정리했었다.
아이 낳은 지 5개월 만에 힘든 이사를 하고 정리 중인 나에게 집에서 놀면서 재활용 쓰레기도 안 버리고 남편을 시키냐며 힘든 친구의 모습 따윈 안중에도 없이, 나의 새 집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을 감추지 못한 채 분노 서린 그 눈빛으로 단 하나라도 더 깎아내리기 위해 혈안이 된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몇 년간 왜 그녀가 나에게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가 비로소 이해가 됐었다. 바보처럼 하나뿐인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무언가 그녀에게 잘못한 게 있었나 되돌아보고 나 자신을 학대하면서 보냈던 어이없는 시간들이.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퍼즐들이 딱딱 맞아떨어지며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가 스케이프고트 딸에게 주는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며 나 자신까지 헤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나도 TV속 그녀들처럼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했고 나 자신조차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받은 학습의 영향으로 나도 누군가에게는 나르시시스트였을 때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그것을 인지했기에 주의하고 조심하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나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과 동기부여를 해준 녀석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많은 것들을 깨닫고 더 이상 그녀가 원하는 대로 나 스스로를 함께 깎아내리지 않으니 굉장히 약 올라하는 모습을 보이며 더욱 혈안이 되어 쉴 새 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경험상 나는 안다. 분함을 못 이긴 그녀는 이제 다른 곳에서 나의 험담을 하며 나의 평판을 깎아내릴 것이라는 것을. 그동안 그녀를 위해 진심을 담아 챙겨주며 애썼던 시간과 돈과 노력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버티고 인내하며 참아준 시간들은 늘 그런 식으로 나에게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더 이상 나의 진심은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쏟아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 만든 거였다. 주위를 그런 인간유형으로 채우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그들에게 내가 챙겨주고 격려했던 진심 따위는 아무것도 중요치 않은 거였다. 먹잇감을 짓밟고 올라서서 승리의 기쁨을 맞이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이었으니까.
동물의 본성만 남은 추악한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생존 방법인가 해서 동정심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청춘들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나를 옥죄고 있는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란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어린 시절의 그 아이, 당신의 탓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더 이상은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스스로에게 백신을 주자. 경험상 생각보다 훨씬 간단한 거였다.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