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순씨

by 조각들

열쇠


해가 넘어간 저녁에 우이천 산책길을 뛰었다.

나의 일상이다.

헬스기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데

후레시를 들고 이리저리 휘적거리는 어떤 할아버지가 보인다.


- 뭐하세요?

- 열쇠를 찾어. 운동을 하다 열쇠가 떨어졌어.


치매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척 전라도 사투리를 써가며

능글맞게 그의 허리춤 주머니를 더듬거린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후레시를 빼앗아 대신 그의 열쇠를 찾아드려본다.


- 집에는 가족들이 있어요?

- 응

- 그럼 문 열어달라고 하시지

- 열쇠는 찾아야 허니께


갑자기 떠오른다. 통장을 찾던 재순씨.



통장


노인복지 연금과 용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어딘가 깊숙히 숨겨두고선

사라졌다며, 내놓으라며

난리를 피던 재순씨.

이윽고 찾아낸 통장을 다시 잃지 않으려

더 이상한 곳에 아무도 모르게, 예를 들어 두꺼운 비단솜이불 틈속에 숨긴다.

좀 이따가 또 내놓으라고 난리를 친다.


그녀의 모든 치매증상을 받아 안은 순자씨.

사십대 후반을 그렇게 살아간 순자씨.


스물 네 살, 나는 군대에 갔다.

하루가 다르게 힘을 잃어가던 재순씨.

치매끼로 순자씨를 괴롭히는 일도

더이상 못 하게 된 재순씨.


어느날 조용한 방에서 조용히 돌아가신 재순씨.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느라 그 고요한 생사의 경계를 목격하지 못한 순자씨.

재순씨의 부재를 발견하기만 한 순자씨.


죽기 전에 늘상 나의 이름을 찾으셨다는 재순씨.


- 대웅이 어디 갔냐?

- 군대 갔잖아요.


- 대웅이 어디 갔냐?

- 군대 갔어요.


나와 늘 함께 잤던 재순씨.

떠나가던 그날도 나를 찾는 목소리가 한참 들리다가 잠잠해지셨다.

나랑 같이 누웠던 방의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도 모르게 떠나버린 그녀.


입대 후 8주에 첫 외박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6주차에 연락을 받고 뜻밖의 첫 외박을 나왔다.

마지막 입관 전 피골이 상접한 그녀의 잿빛 얼굴을 봤다.

살은 다 말라버렸지만 넙죽한 얼굴는 그대로였다.

마치 숨을 쉬려는 듯, 인사를 하려는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재순이


일제 시대에 태어나 기록도 없고, 추적도 되지 않는 어떤 가난한 삶을 살았을 재순씨. 어떤 불쌍한, 또는 소녀같았던, 또는 지옥같았던 삶을 살았을지 알 수 없는 재순씨. 결혼 후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어떤 삶들을 살았을지 모르는 재순씨. 그저 착한 넷째 아들의 집에 평생 함께 살며 교회를 흥겹게 다니고, 빠다코코넛을 먹고, 동네 노인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재순씨.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치매에 걸리고, 늙고 쇠약해져 생을 마친 재순씨. 팔십오년 동안 어떤 꿈을 꿨을까, 어떤 절망에 빠졌을까. 어떤 미안함을 가족들에게 가지고 있었을까. 죽음이 다가올 때 그녀는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기록해두지 않았다.


가끔 재순씨가 보고 싶다.

나 왔다고.


안재순 1921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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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순씨와 연욱과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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