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누나
이대에서 충정로로 넘어가는 아현동 언덕길을 걷다가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초등학교, 실은 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서울 고모집에 올라와 며칠 있다 간 적이 있다. 왜 갔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재순씨, 할머니가 가끔 서울에 가서 지내는 시기가 있었는데 내려오실 시기에 맞춰 겸사겸사 해서 내가 간 것 같다. 일주일 정도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인데, 여렀을 때 감각이지 실제로는 두 밤 잤다. 첫날 밤에는 만취한 고모가 들어와 구토를 했던 기억, 두번째 밤에는 9시 뉴스를 보며 고모부가 잎담배를 폈던 기억. 그 외에는 밤의 기억이 없고, 전주로 내려왔기 때문에 두 밤이 맞을 거다.
고모부는 유명한 국악인이었다. 매우 유명했다. 지금은 고모부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당시 집은 마포 아현동 언덕에 있는 조그만 빌라였고, 반지하였다. 꽤나 유명하셨던 분이라 돈을 많이 벌었어야 정상인데, 아무리 유명해도 서울에서 근사하게 사는 것이 극히 일부의 얘기인건가. 그가 돈을 엉뚱한 곳에 썼던 건가. 후자일 것이라고 본다.
기억을 더듬어 그 집 골목에 찾아가봤다.
첫 날 저녁. 만취 상태로 밤늦게 집에 들어온 고모가 거실에 구토하는 것을 보았을 때, 서울의 민요가수 아줌마의 흔한 모습이려나 싶었는데, 속내는 가정 문제로 많이 힘드셨던 것 같다. 늘 그랬을지도 모르고.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상처를 받은 나는 다음 날 그 집 신발장에 있던 축구공을 들고 근처 중학교 운동장으로 나갔다. 나름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공차기를 했다. 축구를 많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놀러 온 조카가 아침부터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난리가 났다. 고모는 미안하다며 저녁에 맛있는 식사를 차려주었다.
저녁 식사 후 고모부와 9시뉴스를 봤다. MBC가 11번 채널인 것이 신기했다. 전주에선 10번인데. 고모부의 지인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와 있었는데, 두 사람은 말아서 피는 담배 같은 것을 말없이 신중하게 즐기고 있었다. 농담으로 나에게 권유해보기도 했다.
사촌 동생의 이층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다음날 전주로 내려왔다. 사진의 아현동 로터리와 육교가 기억난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효창운동장과 용산박물관 앞을 지나 반포대교를 건너 고속터미널로 갔다. 서울에 올 때는 설렜지만, 이틀이 지난 뒤에는 빨리 전주에 도착하고 싶었다.
중학교 때 고모댁이 늦은 결혼식을 올려서 - 이유는 모른다 - 다시 서울에 간 적이 있다. 하얏트 호텔 잔디밭에서 고급스럽게 진행되었고, TV에서 보던 유명 국악인들이 그 곳에 있었다. 쓰리랑 부부의 신영희 명창도 있었다. 고모부의 잦은 외도 때문에 두 분은 나중에 이혼을 했다고 했다. 꼭 외도 때문만이었을까. 그래서 그 고모부였던 분은 지금 나의 고모부가 아니다. 몇 년 뒤 사촌동생이 전주의 육군 35사단에 입대하는 날 마지막 사제 식사를 하기 위해 만난 것이 고모를 본 마지막이었다. 요즘은 소식이 닿지도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수화기 건너편의 아버지와도 나눈 얘기다. 나는 고모가 어디서 요즘 뭘하실까 궁금하다는 얘기를 했고, 아버지는 몇 년 전 아는 경찰 분에게 신변조사를 부탁해보려 했지만 개인정보 보호 문제로 알 수는 없었단다. 아버지는 다섯 남매 중 넷 째이고, 전라도 김제에 사는 첫 째 누나와만 아주 가끔 연락을 하고 있다. 둘 째인 큰 형은 어렸을 때부터 출가해 혼자 살다가 가끔 아빠에게 돈을 빌리러 찾아오고 또 연락을 끊고 했다. 엄마는 그를 개새끼라고 한다. 셋 째가 아현동에 살던 고모이다. 막내 고모는 속병이 걸려서 죽었다. 나는 아버지가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여전히 아버지를 외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아현동 골목을 걷고 있었다. 내가 혼자 공차기를 했던 그 학교가 어딘지 찾고 싶었는데 없어진 것 같았다.
"마을이 개발되서 그런지 그 때 그 집 있던 데가 어디쯤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자, 아버지는 내 집 얘기를 했다. 서울은 아니더라도 경기도 외곽 정도라도 집을 구해 본다면 아버지가 도와줄 테니 잘 알아보라고. 청약도 잘 붓고 있으라고.
"다들 잘 살고 있을까요?"
오늘 이 글을 다시 쓰며, 고모부였던 그 사람의 이름을 검색해봤다. 70대의 노인이 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의 자료들이 쉽게 검색되었다. 그의 이름 뒤에는 명인이나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우리 고모에게 상처를 줬지만, 그는 대단한 예술가이다. 그의 연주를 보면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이제는 그도 노인이 되었다. 그의 근황을 쉽게 찾았는데, 고모의 이름은 알지도 못하고, 찾아볼 수도 없다는 것이 슬프다.
사실 아현동을 지날 때마다 고모네가 생각난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각난다. 매번.
이제는 서울에 오래 살았고, 아현동도 자주 지나서 생각이 떠오르는지 아닌지도 무덤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