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소원
어느 소원 /김미애
지난 일기장을 뒤적거리다가 구청에서 민원안내 도우미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썼던 페이지에서 멈췄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 눈자위가 붉어졌던 한 할아버지의 딱한 사연에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내가 나이를 많이 먹어논께 눈도 침침하고 뭘 잘 몰라서 그란디 이거 쪼까 봐줄라요?"
얼굴에는 살아온 흔적이 훈장으로 남은 주름이 가득하고,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누렇게 빛이 바랜 구호적등본과 최근의 호적등본을 갖고 오셔서 한번 봐달라고 하셨다. 최근 호적등본의 손자 기입란에 쓰인 내용이 무슨 말이지 모르겠다고 했다.
구호적등본에는 손자의 친권이 할아버지의 아들로 되어 있었는데 아들 내외가 이혼 후 신호적등본에는 며느리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권해 드린 의자에 기력이 쇠한 몸을 기대앉은 할아버지께서 길게 내쉬는 한숨과 함께 사연을 풀어 놓으셨다.
"아들이 직장에 댕김스로 주식에 손을 댔는가 봅디다.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끌어땡겨서 몽땅 증권에다 꼬라박아부렀는디 그게 폭삭 거덜나서 깡통이 되어 주저앉아분께 집안이 풍비박산 나버리지 않았겄소.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속이 상한께 맨날 사네! 못 사네! 함스로 보따리를 싸고, 빚쟁이들한테도 밤낮으로 시달리니 무슨 정신이 있었겄소?······ 그 와중에 아들이 직장에서도 쫓겨나불고 집안 꼴도 엉망인께 하도 보기 딱해서 내가 알음으로 농협에 취직을 시켜줬지라. 한동안은 맘 잡고 착실히 댕긴가 싶드마 아, 근디 거기서도 돈을 만지다 본께 또 눈이 뒤집혔는가 봅디다. 지 딴에는 본전이라도 건져보겠다고 여기저기에서 막 돈을 끌어다가 꼬라박은 모양인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주체할 수 없으신 할아버지의 하소연이 주춤하다가 다시 이어졌다.
"아! 이 미친놈이 공금까지 손을 대서 주식에다 몽땅 쏟아 부었다 안 하요? 어쩌겄소? 지 놈 하는 짓거리로 봐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버려 둬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내 자슥이 저질러놓은 것이니 아비인 죄로 수습은 해줘야 쓸 것 아니요? ······시골에 있는 전답 몽땅 팔아다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뒤치다꺼리는 간신히 해주긴 했지만 인자 직장에서 모가지 당해부렀다 안 하요. 그 일로 아들과 며느리가 허구한 날 티격태격 다투더니 결국 나 모르게 이혼까지 해부렀다고 합디다. 즈그들이 맘에 안 맞아서······그라고 순전히 우리 아들이 잘못해서 그리 된 건께 며느리가 못 살겠다고 이혼한 것까지는 백번 할 말이 없단 말이요. 그란디 눈에 밟히는 손자까지 며느리가 친정으로 데리고 가불드마 한 번도 안 보여줄라고 한단 말이오."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던 그 할아버지는 가죽만 앙상한 주름진 손등으로 눈가에 맺힌 이슬을 훔치셨다.
할아버지의 딱한 사연을 듣고 있으려니 내 마음마저 답답해지다 못해 목이 콱 막히는 듯해서 뭐라 위로해 드릴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곤 가만히 고개 끄덕이며 할아버지의 하소연을 들어드리는 게 전부였다.
"하찌! 하찌! 하고 안기는 손주가 눈에 아른아른하고, 즈그 할머니도 손주가 보고 싶어서 몸져누워 부렀어라. 아이는 엄마 손에서 커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우리 핏줄인께 우리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게는 해줘야 할 것 아니요? 손주가 보고 싶다고 며느리 친정으로 전화를 했드마 앞으로 손주 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고 전화도 하지 말라고 매몰차게 끊어버립디다. 손주가 다니던 유치원마저 딴 데로 옮겨부러논께 인자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게 되어부렀어라."
더는 말씀을 못 이으시며 고개를 푹 숙인 할아버지의 구부정한 등에 납덩이 같은 한이 내리누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한숨은 며느리한테로 넘어가버린 친권을 다시 되찾을 길이 없겠냐는 것과 며느리가 혹시 개가를 할 경우 손자를 데리고 재혼을 할 때 당신의 손자는 어떻게 되느냐고 하소연하셨다. 할아버지한테 손자 얼굴 한번 보여주는 것도 매몰차게 거절해버릴 정도라면 친권 양도 또한 며느리가 동의해주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제는 호주제 폐지니 뭐니 하여 원뿌리의 의미는 흐지부지되어 버렸지만 그 할아버지의 사연을 들었던 당시만 해도 며느리가 개가를 하여 입적이라는 절차를 거쳐 '양자' 식으로 호적을 바꿔도 아이의 성은 원래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손자가 너무 어려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존재를 잊고 살더라도 아버지가 누구라는 게 호적에 남아 있게 되면 아이가 이다음에 커서 열네 살 이후에는 스스로 선택 권한이 생기고, 그 아이가 철이 들어 뿌리를 찾으려고 하면 언젠가는 아버지를 찾을 날이 있지 않겠느냐는 궁색한 위로를 해드리는 것밖에 달리 방도가 없음이 안타까웠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소? 지금 당장은 며느리가 손주를 키우더라도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다는 거······ 그것만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라······."
눈에 밟히는 손자의 재롱을 볼 수 없어 가슴 한곳이 뻥 뚫어진 것 같다며 연신 눈물을 훔치시고 힘없는 발걸음을 돌리시던 할아버지······.
젊어서는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뼈 빠지게 고생하셨을 텐데 늙어서까지 아들 며느리 갈라서고, 손자까지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험한 꼴을 봐야 하시는 할아버지의 힘없는 걸음이 마음 아파 나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로부터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성년이 되었을 그 손자는 저를 무릎에 앉혀놓고 볼을 비비며 마냥 예뻐해 주셨던 할아버지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연세 많으신 그 할아버지께서는 눈에 밟히는 손자를 안아보는 소망을 한 번이라도 이루셨을까?
부디 그러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