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71219
아이의 불그스름한 양볼이 부풀었다 줄었다. 귀를 가까이 대자 훈기에 내 얼굴도 달아올랐다.
후훗.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달고 따뜻한 냄새가 작은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왔다. 촉촉하고 도톰한 아랫입술이 쑥 내밀어져 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짝 살짝 건드려본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싱글싱글 웃고 손가락 끝에 온 신경과 시선을 쏟으며 노는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감사할 뿐이다.
옆 집 아주머니는 어쩌다 마주칠 때마다
"무슨 애가 그렇게 조용해? 애 있는 집인 줄 모르고 사네"라고 인사를 건넨다.
"애가 건강하고 마음도 편해서 그래. 몸이 약하고 어디가 불편하면 애들이 그렇게 운다. 성격이 좋은 녀석이야 아주"
무릎에 앉히고 까부르면 깔깔깔 웃어 제끼는 아이에게 어른들도 한 마디씩 했다.
밤낮이 바뀌어서 고생들 한다는데, 저녁 먹고 자면 아침까지 단 한 번도 깨지않고 깊은 잠을 잔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너만큼은 마음 고생을 하지 않기를.
속상하고 어지러운 마음은 나만 갖고 살아가도 충분하다.
밤이 되어 아이가 잠이 들면, 본격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
출산 휴가 90일을 제외하고는 일을 놓지 않았다. 급한 연락은 중간에 전화로 오지만, 대부분의 업무 지시는 이메일로 전달된다. 가끔 자정이 넘어서 전화가 걸려오는 일도 있었다. 보통은 깨지 않는 아이도 통화소리를 들으면 잠을 설치고, 통화는 보통 한시간 이상이다.
이런 일이 두어번 있어 대표에게 이야기 했다.
"너무 늦은 시간에는 전화 주지 않으셨으면 해요. 급한 일은 대부분 낮에 전화주시는데, 밤에 전화를 주실 때는 어차피 당장 일처리를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아이가 자꾸 깨서요"
"어~ 알았어. 미안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네. 바로 얘기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밤시간에는 전화하지 않을게"
10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통화로 전달할 업무 내용이란 무엇일까?
재택근무의 편의를 봐준 것은 감사하지만, 아이를 돌보면서 짬짬이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재택근무를 한다고 해도 실상 남들이 출근한 시간부터 퇴근한 시간 이후까지 혹은 자정을 넘어서까지 컴퓨터 앞에 메달려 있을 때가 많다.
대표는 너무 늦은 시간에는 전화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12시가 넘어서 전화할 때도 있었다.
이후부터는 자신이 늦게 전화한 이유를 먼저 댔다.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한데, 내가 지금 꼭 이야기를 해야 해서 전화했어. 나는 이 시간에도 일을 할 수밖에 없거든."
늦은 시간에 전화 받기 싫으면 9시까지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란 말이야란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출퇴근을 할 수 없다.
꼭 회사에 나가야 하는 일이 있어서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 입으면 아이는 그때부터 긴장 상태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기 직전에는 눈물 콧물 범벅을 하고 평소에는 내지 않는 악을 쓰며 나의 외출을 완강하게 저지하려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집을 나서야 한다.
엄마가 회사 안다니면 우리 뭐 먹고 살아?
엄마가 일을 해야 너 맛있는 거 먹고 장난감도 사고 그러지. 금방 다녀올게란 말을 속으로 되뇌이고 되뇌이며 전철역으로 향했다.
"정말 출근은 할 수 없어요. 죄송해요."
그래도 대부분의 업무가 이메일과 전화 통화를 주고 받으면서 이뤄지기 때문에 재택근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늘도.
잠이 든 아이의 볼과 코와 입술을 닳을만큼 보고 만지고 냄새맡은 후에 일을 시작했다.
하루종일 절전모드로 on 상태에 있는 노트북을 열었다.
나는 깊은 밤에 대한 공포가 있다.
국민학교 6학년. 우리반은 유난히 숙제가 많았다. 달력만큼 긴 문제집을 일주일에 한 권씩 풀고 틀린 문제를 5번씩 배껴 썼다. 재시험을 보고 또 틀린 문제가 있으면 다시 배껴쓰기. 어린이 신문의 영어 회화를 공책에 오려붙이고 문장을 열번씩 쓰고 외우기. 일기는 한 바닥을 꽉 채워 써야 했고, 미술 숙제, 리코더 연습, 독서기록문도 일주일에 한 권씩 써야 했다. 학교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모두 숙제였다.
어마어마한 숙제 덕분에 매일 늦은 밤까지 졸음을 헤치며 홀로 깨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모두 잠이 들었기에 공책 넘기는 소리, 연필 소리만 적막하게 들렸다. 12시가 넘어서까지 앉아서 숙제를 하고 있자니 등허리가 뒤틀리고 손가락과 손목이 얼얼했다.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소리가 높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방문가에 무언가가 요동치며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의 공포에 등을 바닥으로 탁하고 눕혔다.
처음 느끼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포.
그 이후로 늦은 시간 뭔가를 해야할 때는 라디오를 켜든 텔레비전을 켜서 초대하지 않은 그 무엇이 나를 희롱하지 못하도록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건 나이 철칙이었다.
귀신을 보지는 못했지만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그 날의 기억이 언제나 생생했기에.
소리를 최대로 낮추고 TV를 켰다. 한 밤중에는 무서운 내용의 프로그램도 많다. 가능하면 아무 생각없이 틀어놓을 수 있는 예능프로그램이나 착한 드라마에 채널을 고정해두었다.
일의 양에 따라 채널을 돌리지 않아도 되도록 가능하면 이제 시작한 프로나 긴 영화를 찾았다.
오늘의 선택은......
'미워도 다시 한 번'
국민하교 저학년 때겠지? 예전에 본 기억이 났다. 왠지 반가웠다.
다시 보니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애처로운 모정이 아니라,
무책임하고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남자와 사랑한다는 이유로 남자를 놓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내는 여자의 이야기였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엄마, 가지 마~ 엄마"
열두세살은 되어 봄직한 남자 아이가 울부짖는다. 차가운 표정으로 현관 앞에 서있는 남자의 아내는 그런 아이를 완강하게 붙잡고 있다. 아이의 엄마인 여자 주인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에서 나와 골목 어딘가에서 쓰러지며 흐느낀다.
'낳기로 했을 때 저만한 각오도 없었어? 애가 무슨 죄야? 사랑? 웃기고 있네'
갑자기. 였다.
나는 아이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