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199
당장에라도 일어나서 대여섯 걸음만 가면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다.
아이는 옆 방에서 자고 있으니까.
나는 정말 보잘것 없는 인간이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아이가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지!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간 날.
갑자기 찌릿하고 극렬하게 아랫배가 아프고, 통증으로 온 몸에 열이 올랐다. 심장 박동이 가빠지고 참을 수 없는 배뇨감에 걷기조차 힘들었다.
겨우 집으로 돌아온 후 아무래도 응급실에 가야겠다고 나서려는 우리를 그가 막아세웠다.
얼굴을 비스듬히 하고 작고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네"라고 답하기를 기다리는 특유의 표정.
통증이 점점 심해졌지만
"병원 다녀올게요"라고 한다면, 병원은 커녕 밤새 침세례를 받으며 분노가 섞인 날선 말을 듣게 될 것이었다.
빤히 바라보며 기다리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통증을 핑계로 시선을 피한 채 "네"라고 답하고 조용한 밤을 받았다.
몇 분 간격으로 화장실에 드나들어야 했고 누워있으면 통증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아 침대에 걸터 앉은 채로 밤을 지샜다.
이른 아침 산부인과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간호사가 문진표를 작성하라고 했다.
임신, 출산.
산부인과는 처음이었다.
점보다도 작은 생명이 내 안에 있었다.
몇 주 전부터 기침감기가 심해서 병원을 옮겨가며 더 독한 약, 더 빨리 떨어지는 약을 먹고 있었다.
"아주 초기라 상관없어요"
우유의 비릿한 맛이 싫어서 초코우유를 마셨고,
초콜릿 알갱이가 씹히는 다크 초콜릿 아이스크림, 카페 모카를 선호했다.
딸기 아이스크림은 몰라도 딸기 우유를 집어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편의점에 초코우유가 없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있었더라도 왠지 딸기 우유를 선택했을 것이다.
"여기 보세요. 몸 길이 일점 팔 센티미터. 머리 팔 다리 보이시죠?"
공벌레 같은 나는 아이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상기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가로등은 어둠에 빛을 빼앗기고 있었다.
바닥을 비추던 빛무리가 희미해졌다. 빛의 파장도 짧아져서 전구 바로 아래까지만 뻗어나갔다. 밤이 깊어진 것이다. 어둠은 빛이 닿지 않는 곳부터 잠식한 후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너만 참으면 돼"
"너가 문제야"
"넌 참 이해가 안 된다"
"네 주제에"
"넌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야"
"너 내가 언제든 정신병원에 보낼 수 있어"
"엄마는 새로 얻으면 돼"
"니 새끼 데려가"
"유전자 검사해. 혹시 모르잖아"
"맘만 먹으면 회사다니면서 점심시간에라도 남자 만나지 말란 법 있니?"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아"
"여기 너보다 잘 난 여자들도 숨 죽이고 사는 곳이야"
말로 하는 폭력에 길들여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전날 그 놈의 어머니에게 뺨을 맞은 후 나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맞고는 못 살아요"
나와 아이의 여권이 든 가방을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침실에 서랍장 하나 놓을 자리도 얻지 못해 1층 가라지에 둔 서랍장에서 당장 입을 옷과 기저귀를 챙겼다. 찬바람이 쌩쌩 들어와 밖에 있는 거나 진배 없는 가라지에서 옷을 갈아입을 일이 더는 없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이제 됐다 싶었다.
그렇게 집을 나온 후 머물던 호텔로 그들이 찾아왔다.
"내가 너희 소개해서 결혼까지 했는데 그동안 누나 역할을 제대로 못한것 같아"
마지막으로 만나서 얘기좀 하자며 그 놈의 누나가 호텔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잠에서 깬 아이는 아빠와 고모를 보고 신이 났다. 소파 위를 걷고 기며 그저 싱글싱글 웃었다.
"얘기 좀 하게 애 좀 데리고 나가 있어. 저기 가서 애랑 같이 물이라도 사와."
누나가 어, 어하고 있는 사이 자꾸만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라고 얘기하는 그에게
"밖에 추운데 옷도 안 입고 왜 나가라고 해?"라고 하는데
그 놈이 아이를 안고 현관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나는 백미터 달리기를 싫어한다. 최선을 다해도 28초. 정말 빨리 뛰어도 26초.
그냥 뛰는게 싫은 아이였고, 빨리 뛰는 법을 몰랐다.
그러나 그 날 밤 나는 백미터를 12초에 달린다며 자랑하던 그놈의 머리채와 아이를 놓치지 않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밤이었다.
더이상 말이 오갈 필요가 없었다.
등 뒤에서 가냘프게 매달릴 수록 나는 가늘고 힘이 없는 머리카락을 쥔 손과 아이의 옷을 더욱 단단히 그러쥐었다. 머릿 가죽이 잡아당겨지는게 손가락 사이로 느껴졌다. 아이를 안고 있는 그 놈도 필사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도 양 팔로 아이를 꼭 안고 있었다.
짙은 어둠으로 가득한 밤이었다. 가로등은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호텔 정문만이 밝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 하얀 물체가 움직였다. 자동차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자동차라는 것을 알았다. 낯익은 걸음걸이와 목소리가 이 쪽으로 걸어왔다.
"야!
너 그동안 많이 누렸잖아! 이제 우리가 아이 키우면서 기쁨 누릴 차례야!"
분노에 찬 허스키한 큰 목소리.
매일 밤 잠들지 못하게 나를 괴롭히던 목소리.
분이 풀릴 때까지 소리치던 그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걸어나와 나의 오른쪽 팔에 매달렸다.
자동차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작은 몸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엄마"
"안돼. 나오지 마. 여준아. 차에 타고 있어!"
내 아이에게서 나를 떼어놓으려고 등 뒤에서 두 팔을 부여잡고 있는 그놈의 누나가 제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누구 도와줄 사람 없나요? 도와주세요."
간절하게 외쳤지만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는 것은 한데 뒤엉킨 다섯명 뿐이었다.
절망적이었다. 이대로 손을 놓아야 하는 걸까. 그 집에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만 포기하면 되는 걸까?
짙은 어둠이었다.
울부짖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렸지만 표정은 전혀 살필 수 없었다.
어둠이 창을 넘어 들어왔다.
조용히, 어둠의 묵직하고 고운 입자가 벽을 타고 바닥을 쓸며 빛이 닿지 않는 구석부터 채우고 있었다.
"후우"
왜? 왜 울었지?
들어올 때와 달리 어둠은 소리를 내며 창 밖으로 뒷걸음 치며 빠져나갔다.
죽을 것 같아.
빛은 가로등이 향하는 바닥과 주변의 공기까지 밝혔다. 불 빛 아래로 작은 벌레들이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전등을 모두 끈다고 해도 가로등 빛 때문에 완전한 어둠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밤이 늦을수록 빛은 약해진다.
늦은 밤 깨어있어야할 때면 가로등이 켜져 있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암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