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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은 Nov 19. 2024

어둠의 조각을 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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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를 잡을 틈도 없이 서 있던 등산객들이 내리느라 버스는 한참 동안 정류장 앞에 서 있었다.


오랫만이야.

아직 봉오리가 작구나.


줄기가 한 줌 밖에 안 되는 가느다란 나무가 정류장 팻말 뒤에 몸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로에 지어진 주택들이 켜켜이 쌓은 그늘이 나무를 더 약해 보이게 했다. 

늦게 꽃을 피우는 이 나무를 매년 봄마다 가슴 졸이며 찾았다. 

너무 빈약해서 잘려나가지 않았을까. 버스 정류장 팻말을 가릴까 꺾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몸을 숨기고 있는 거니?

혹시라도 쓸모없다고 거추장스럽다고 잘려질까 봐?

꽃이 필 때가지 자목련 나무는 조심스럽게 가만히 그늘 안에서 움츠리고 있는 것 같았다.

행여 그늘에 가려, 늦게까지 메마른 가지라 잿빛 건물에 동화되어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으면 눈을 깜빡여 밝게 한 후 아직 그 자리에 존재하는 나무를 보고 안심했다.

이 정류장에 서 있는 자색 목련은 버스가 지나는 길에서 가장 늦게 개화하지만 공기가 서늘해서인지 꽃도 오래 피었다. 

흠없고 폭신한 꽃잎이 도도하게 뽐내며 화려하게 피다가 초라하게 떨어져 검게 변하는 백목련이 모두 질 때쯤자줏빛 꽃을 피우는 이 나무를 처음 본 것은 십 년도 훨씬 전이다.

올 해도 살아있는 것,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터널 저편은 봄에는 노란 개나리로, 초여름에는 보랏빛 칡꽃으로 물들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공기를 한 껏 들이마셨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엉키고 얼굴을 두들기면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우는 것들이 말끔하게 날아가 버린 듯이 상쾌하고 후련했다.

창문을 마음껏 열어도 뒷사람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맨 뒷자리에 앉기 위해 버스를 몇 대 보낼 때도 있었다. 어렵게 얻은 뒷자리에 앉으면 오늘 하루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터널을 통과하는라 잠시 닫았던 창문을 자목련 나무가 있는 정류장에 도착해서 활짝 열었다. 냉기가 밀려들어왔다. 햇볕은 따뜻해도 그늘 밑에서는 한기가 느껴지는 계절이다.


 좌석이 듬성듬성 빈 후 버스는 한결 가볍게 달렸다. 

버스는 이제 오른쪽으로 회전해서 개천을 지날 것이다. 왼쪽 창문 밖으로 수양버들이 연둣빛 가지를 축축 늘어뜨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로 건너편에서 아무렇게나 그것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류장에 멈춰 섰을 때 연두색 구슬을 엮은 것 같은 싱그러운 줄기를 가까이서 차분하게 보고 싶었다.  

버스가 오른쪽, 왼쪽으로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는 동안 개천을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고, 주택들 너머로 드러난 산등성이에 노랑, 분홍의 봄이 보였다. 

자하문 고개 정상 신호등 앞에서 잠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제 곧 이 동네에서 가장 멋진 봄 소식을 보게 될 것이다

산의 정상에서 땅으로 내리쬐는 햇볕을 거리낄 것없이 몸으로 빨아들이고 있는 백목련은 북악산의 봄 주인공이다. 

다른 봄꽃들이 꽃샘추위를 견디느라 봉오리를 아직 터뜨리지 못하고 있지만 이 나무에서는 탐스러운 미색 꽃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벌써 활짝 피고 진 꽃잎들이 나무 주위에 떨어져 땅도 미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좁은 산길을 시원하게 달려 내려오며 창문을 열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려도 좋다.

지금 어디 가는 거더라?

뭐하러 가는 길이더라?

모르겠다. 

생각이 안나도 좋다. 

바람에 다 날려보내자.


버스가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속도가 줄자 바람이 약해지고 머리카락이 가라앉았다. 바람의 웅웅 대는 소리가 사라졌다.


버스는 어느새 우회전 하며 낮은 주택가 사이로 들어섰다. 

창문을 닫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었다. 쓸어올리고 내리고 쓸어올리고 내리고. 버스가 복잡한 도로에 접어들어서 정부중앙청사로 향하는 교차로에 다다를 때까지 엉킨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냈다. 

좁고 복잡하게 갈라진 도로는 비집고 막아서며 전진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려는 치열한 싸움터였다.


이제 내릴 때가 됐다.


춥다. 바람이 세네. 

차들의 움직임으로 만들어 낸 공기의 흐름이 건물사이를 돌아 빠져나오며 거센 바람이 되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온 몸을 마구 두들겨대는 것 같았다. 

어깨를 잔뜩 올리고 목을 움츠렸다. 눈이 시려서 앞을 볼 수 없어 눈꺼풀을 반쯤 내리고 바닥만 바라보며 걸었다. 


춥다.

아직 봄이 아닌가 보다.


봄기운에 따뜻하게 데워진 유리창 안쪽은 땀이 배어나올 정도로 훈훈했는데.

잠시 옷을 너무 두껍게 입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는데, 

쌀쌀함이 파고 들어 허벅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탁 트인 광장 양 옆으로 버스와 자동차가 지나갔다.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와 판석을 깔아놓은 광장. 걷는 사람도 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도 같은 높이에서 길을 지나고 있었다. 이쪽과 저쪽이 경계가 없이 암묵적인 약속으로 구분된 길을 통과하는 것이 왠지 두려웠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은 걸어도 되는 길인가? 혹 차가 지나는 길위를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군가와 이 길을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지금이라도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을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둘? 

몇 명 정도가 되어야 행복지수를 평가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의 수로 행복지수를 평가하는 것이 타당할까?

관계의 총량은 질량에 비례해야 되는 걸까?

바람이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또는 반대 방향으로 지나쳤다. 

광장 주변을 달리는 자동차도 같은 방향으로 또는 반대 방행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스치듯 지나치는 것이 일상인데....

나는 왜 누군가와 그런 인연을 맺었을까?

문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었더라면.


"그래도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제가 제일 두려웠던 게 뭔 줄 아세요? 

저는 혼자가 될까봐 늘 두려웠어요. 

매일 퇴근할 때 버스를 타고 서울역 앞을 지났어요. 

그 앞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댈 곳 없이 외로워질까봐 두렵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언젠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도 결혼하고 나면 결국은 나 혼자가 될 텐테, 

제 인생이 외롭고 쓸쓸해질것 같은 생각에 병들어 가고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혼자가 아니잖아요.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고, 엄마가 되어서 씩씩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어느 때보다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그래서 이제는 외롭다는 생각 대신 그들도 누군가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을 텐데, 사랑받고 자랐을 텐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요.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그 사람을 만난 것은 후회하지 않아요. 대신 그 이후의 선택은 달랐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 사람만큼 좋아했던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밉지만 지금도 가끔은 좋았던 때가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그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이도 없었을 테고. 아뭏든 후회하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후회가 안돼요."


버스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광화문을 지나 서울역을 돌아나와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내렸던 자리에서 길을 건너 버스를 탔다. 

중간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봤다. 관광객만이 길을 걷다 멈춰 서서 사진을 찍거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모두들 쉬지 않고 움직였다. 길은 지나는 것. 멈춰 서는 곳이 아닌 듯 했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서 조금 더 달리면 다시 봄이 만개한 풍경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무거워진 마음은 순식간에 봄기운에 녹아내릴 것을 안다. 따스한 볕이 유리창을 투과하면 빛이 닿는 모든 것이 봄으로 바뀔 것을 알고 있다.

엔진 진동에 유리창이 달달달 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진동을 느끼며 유리창에 머리를 가만히 댔다. 


언덕을 오르기 전에 운 좋게 뒷자리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유리창은 햇볕에 달궈져 따스하고 닫힌 눈꺼풀 안에서 점점이 동그란 빛 그림자를 만드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마음껏 들이 밀었다.



좋아하는 것 

1. 버스 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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