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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은 Nov 12. 2024

어둠의 조각을 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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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묵직하게 덮어누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먼지 요정처럼 아주 작은 검은 입자들이 들어와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형태가 있다면 자리할 수 없는 공간까지 점령한 후 밀도가 높아지면 빛이 차단되고 가벼운 변동성을 지닌 검은 분자는 점성을 지닌 끈적한 물질이 되어 차곡차곡 내리누르며 정복한다.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풍경이었다.

창을 넘어 포진하는 어둠을 보며 그 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습도, 온도, 서 있는 다리의 감각까지 느끼면서.


매일 오후 4시 해가 지면 비가 내렸다. 오전 7시 해가 뜨기 전까지 밤새 내린 비는 대기와 땅을 깨끗이 씻어냈다. 세수를 한 말간 얼굴처럼 쾌청한 빛을 분사하는 태양빛이 화사하게 비추는 아침 햇살은 세상에서 가장 밝고 찬란하고 화사한 색을 갖추고 있었다. 빗물은 고운 자갈이 덮인 속으로 빨려들어가서 웅덩이를 만들지 않고 땅도 질척이지 않았다. 

북위 49도 침엽수림이 빽빽한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은 설경이라고 들었지만 겨울인데도 선선한 기온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눈으로 바뀌던 날. 아침 햇볕의 빛깔은 같았지만, 촉촉하게 푸르름을 드러내던 풍경이 온통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이 만들어 낸 풍경에 대한 감동은 머리 한 구석에 작게 접어 넣어두었다.

멀리 로키산맥이 보이는 격자무늬 창의 블라인드를 올리고, 밤새 냉기를 막아주던 이불에서 나와 수면양말을 보온화로 갈아신고 시작되는 나의 하루.

오늘은 아무 일이 없기를. 

눈 뜨고 움직이고 먹고 밤이 되면 잠이 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적인 하루가 되기를 기도하며 주방으로 내려갔다.


"어머, 눈이 왔네. 오늘은 밥 먹고 공원에 가자. 눈이 하얗게 왔구나"


삶은 계란, 냉동블루베리, 고구마를 쪘다.

밤벌레처럼 통통한 아이 입에 바나나와 삶은 계란을 잘라넣어주면, 아이는 짧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동요책의 버튼을 눌렀다. 토마토, 코끼리, 기린, 개구리 그림 버튼 안에 들어있는 동요 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씰룩이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아이의 행복한 웃음에 나는 상처난 단단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만들어낸 미소로 화답했다. 나의 불안과 고통이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이 짧은 행복과 평안의 미소는 하루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눈이 포근하게 내려서일까. 

점심을 먹을때까지, 아니 어제밤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언제나 생각지도 못한 일로 시작되기에.


"눈이 많이 왔네. 저것봐라. 한국에는 이런 풍경이 없잖니? 아름다워~저기, 저기 찍어봐. 딱 외국풍경이잖아"


짙은 녹색의 침엽수 가지가 눈에 눌려 가지를 축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도로는 일찌감치 제설작업이 되었는지 눈이 깨끗이 치워져 있고 갓길에 쌓인 눈도 더럽지 않고 새하얬다. 애애한 풍경 사이로 검은 줄을 그어놓은 듯 진회색의 아스팔트 길을 20분 넘게 달리니 나무가 사라지고 옆으로 드넓게 펼쳐진 평원이 나타났다.  낮은 울타리가 쳐진 평원을 지나 강을 사이에 둔 숲에 도착했다.


"하아"

기분좋게 서늘한 기온이었다. 


"눈이 많이 내려서 숲에는 못 들어가겠다. 요 앞까지만 걷다가 가자"


야생 라즈베리 나무가 키 큰 나무들 사이에서 자라는 숲은 무릎까지 쌓인 눈으로 막혀 있었다. 혼자 왔다면, 서걱 서걱 눈구멍을 만들며 걷는 모험을 즐겼을지도 몰랐다. 

눈으로 뒤덮인 대지와 대비되는 파란 하늘 그 사이를 태양빛이 찬란하게 반사되어 지평선 너머로 퍼져 나갔다. 백년 전 목재를 운반하던 화물기차 선로를 지나 강 위로 난 철교 위로 걸어갔다. 바다로 향하는 강줄기가 햇볕을 반사하며 연보라, 연남청, 연회색, 흰색, 연한 레몬빛에 섞여 있었다. 


무엇이 아니었더라면, 무엇이 없었더라면. 

이 풍경을 온전한 감흥과 평안으로 지켜보기 위해 빼고 지우고 감추어 보았다. 위협하고 불안하게 하는 두렵고 싫은 것들을 하나씩 제한다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까.


그 때였다. 강 위로 조용히 피어오르던 물아지렁이가 순식간에 짙은 안개가 되어 피어올랐다. 철교 위에 선 발도 안개에 잠기고 있었다. 


"가자. 가자. 어머 이게 뭐니?"


서둘러 빠져나가야 했다. 설원과 땅의 경계에 있던 황금 빛이 사라지고 세상 전체가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에 잠기고 있었다. 

대지를 내리쬐던 빛이 눈을 녹이고 수증기가 되어 지표부터 안개가 차곡차곡 쌓였다. 

황급히 차에 탔다. 문을 닫는 움직임으로 안개가 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SMOG.

헤드라이트를 상향등으로 켜고 속도를 높여 빨리 벗어나보려했지만 차가 움직이는 속도보다 안개가 차오르는 속도가 빨랐다. 한적하던 도로가 안개에 발이 묶인 차들로 복잡해졌다. 희미하게 보이는 헤드라이트로 앞 차와 맞은편 차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어머, 점점 심해진다. 이를 어쩌니? 앞이 아예 보이네. 빨리 가자"


안개로 가득채워진 세상. 네비게이션에 의지해 도로를 돌아 간신히 집에 도착했던가?

그 이후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주 어릴적에 먹었던 아이스크림 맛,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와 날씨, 꽃냄새까지 정확히 기억하던 나였는데. 특정한 시절 내 기억은 단편적으로 끊어져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 시절 어떤 장면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나 봐요"


"네, 그런 풍경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눈도 많이 내렸고 햇볕도 강하니까 순식간에 수증기가 안개처럼 덮어버리더라구요"


"그런 풍경을 떠올릴 때 마음이 어때요?"


"음.... 슬퍼요"


"왜요?"


"모르겠어요. 그냥,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는데, 너무 좋다. 멋지다는 생각이 안들어요. 아니, 어쩌면 그 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을수도 있을것 같긴 해요"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나고 순간적이지만 몸이 휘청일 정도로 어지럽기도 하다. 머리 뒷쪽이 콕 콕 찌르거나 찌릿한 느낌이 들때도 있고, 피곤한데 정신이 맑고 잠이 오지 않았다.

신경과에서 검사를 받고 처방 받은 약은 신경을 이완시켜준다고 했다. 


"증상이 너무 심할 때만 드셔도 돼요. 단, 복용후에는 졸음이 오니 가능하면 오후시간에 드세요"


매주 수요일 오전 광화문의 한 공간에서 상담치료를 받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하기까지 1시간 20분. 어젯밤에도 약을 먹었는데 머리가 띵하다. 잠이 부족한건지, 머리가 계속 아픈건지 모르겠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면 좋지 않을까. 긴장한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처방받은 약을 먹고 버스를 탔다. 

잠이 안 온다. 정신이 너무도 맑다.

정수리부터 머리 뒷쪽, 목을 타고 내려가서 척추에 다다르는 신경의 각성이 느껴졌다.


오랜 지인이었던 상담치료사를 만나는 날은 오랫만에 느껴보는 생활의 활력이 되었다. 

나의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듣지 않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지도 않았다. 잡동사니에 뒤덮여 있던 길을 친절하게 비로 쓸며 안내하는 안내자 같았다. 


뭐가 있지?


9시 10분

고맙게도 아이는 매일 8시가 되기 전에 곯아떨어진다. 하루를 온전히 건강하게 보내고 있는것 같아서 감사하다. 일찍 자는 아이 덕분에 나의 오후 시간은 언제나 자유롭다. 

한 시간째 빈 수첩을 열고 한 글자도 쓰지 못해 끙끙대고 있어도 될 만큼.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을 때는 서걱서걱 종이 위에서 연필이 내는 소리를 들으면 떠오르는 것이 많았는데.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봐요. 

전에 좋아했던게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아요. 

두 번째는 나를 안아주기. 팔을 엇갈려서 두 손으로 나를 꼭 안아봐요. 

쓰다듬기도 하고, 

내가 나를 안는 거지만 다른 사람과 포옹하는 것과 같은 심리적 효과가 있어요"


상담 치료사는 늘 숙제를 내주었다. 

포옹은 쉽지!

아이와 늘 포옹하고 뽀뽀도 하고, 그런데 내가 나를 안아주는 건 좀... 이상한데...

팔을 엇갈려서 최대한 손을 뒤로 뻗었다. 어깨죽지가 손 끝에 닿을락 말락.

조금만 더 뻗어보자. 최대한 누군가의 품에 안긴 것처럼 정성을 다해 나를 안아보자.

고개도 약간 숙이고 눈을 꼭 감고 포옹의 감촉을 느껴보자.


아니, 

누군가가 안아주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도 손바닥과 팔로 전해지는 내 어깨와 팔.

다른 사람이 나를 안았을 때 느끼는 감촉이 이런것 이겠구나.


너도 이리 와 봐. 꼭 안아줄게.

안아주는 것을 너무 너무 싫어하는 고양이는 혹시라도 잡힐까봐 요리조리 도망다니다. 

한 번만 안아보자. 

200그램 밖에 안되는 작고 병든 녀석을 길에서 구조해서 정성으로 돌봤는데 안아보지도 못하게 하다니.

괘씸하지만, 따끈하고 복실복실한 작은 몸을 운좋게 품에 안으면 발버둥치는 대신 그르렁 그르렁 골골대며, 어떻게 빠져나갈까 궁리하며 심장을 콩닥이는 것이 사랑스럽다. 


자, 포옹 숙제는 했고...

어휴, 좋아하는 게 뭐였는지? 

내가 뭘 좋아했더라......

뭐라고 쓰지? 연필 끄적이는 소리를 듣고 싶은데..

쓸 말이 없다...

좋아하는 게 없다고? 


생각이 안 나.


내가 뭘 좋아했는지...


음...

일단 연필이 종이 위에서 내는 소리를 좋아해.

그리고.

전에 공원에서 커피 마시면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어.

음. 그것도 괜찮은 것 같다.

근데 좋아하는 건 아닌데...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자.


밤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찾아낼 수 있는지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둠이 나를 찾아왔던 날 이후 나는 밤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네 까짓거 하나도 안 무서워. 그 날 밤 그렇게 달려들던 것들 틈에서 난 아이를 지켰어. 난 강한 사람이야. 네가 아무리 무겁고 딱딱하고 어둡고 거대하다고 해도 난 절대 지지 않아. 난 잃지 않았어. 난 지켜냈어."


가만히 지켜보던 어둠이 다시 창을 넘으려고 할 때 나는 소리없이 외쳤다. 외치고 나면 어깨가 펴지고 가슴 속에 뭉클한 것이 심장 위로 떠올라 부풀어오르는게 느껴졌다. 


11시 49분.


아직도 찾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머리가 아프다. 오늘은 잠이 안 와도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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