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조각을 잘라

지나가는

by 은의 정원

의도적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구조물은 기성세대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고지식한 형식에 대한 집착으로 자연 안에서 느슨해지고 싶은 마음을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것 같아 불쾌했다.

농업대학 건물 오른쪽으로 수목원으로 향하는 문이 있다.

건물 주변의 작은 온실과 텃밭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단과대학을 뱅 둘러싼 농지에서 거름 냄새가 풍겨왔다.

아스팔트가 붉은 흙에 물들어 있는 농대 건물 앞을 지나면 야트막한 언덕 사이 수목원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있다. 두 사람은 넉넉히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너비의 길 가운데 담도 없이 문지방과 기둥, 좁은 지붕을 얹어 한 사람씩 통과할 수 있게 세운 좁은 출입구를 통과하기 위해 동행하던 친구를 앞세우기도, 앞장 서기도 했다.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 문의 양쪽으로 걸을 수 있는 여분의 길이 있는데, 굳이 이 문지방을 넘는 이유가 뭘까 매번 문을 지나고 나서 생각했다. 의도적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구조물은 기성세대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고지식한 형식에 대한 집착으로 자연 안에서 느슨해지고 싶은 마음을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것 같아 불쾌했다.

마치 속임수에 걸려든 후에 후회하는 것 같이 개운치 않은 출입구를 지나면 길 가운데 방부목으로 만든 정원용 벤치가 배치되어 있고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양 옆으로 늘어선 넓은 공간으로 들어섰다. 좀 전의 불평과 불만은 자연이 주는 해방감에 티끌만큼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버렸다.

꽃샘 추위가 사그라지고 모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짧은 계절동안 오후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나 휴일에 친구들과 수목원에 갔다.

여럿이 소란스럽게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지만, 친한 친구와 단둘이서 흠없이 피어있는 연꽃과 연못 너머로 설명할 수 없이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

가릴 것 없이 탁 트인 하늘의 아랫쪽에서 시작된 석양이 연못으로 번져 빛을 발하던 연분홍의 연꽃까지 붉은 빛으로 물들이는 모습에 취해 하염없이 그 화려하고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점멸 스위치를 내린 듯 해가 지평선 아래로 뚝 떨어지고 붉었던 하늘이 색을 잃고 짙은 어둠으로 변하는 순간에 당황해서 허둥댔다.


가로등이 없는 길은 울창한 나뭇가지가 지붕이 되어 달빛조차 가렸다. 완전한 암흑의 공간에서 소리와 발바닥의 감각만이 유일한 길잡이가 되어 문지방과 좁은 지붕이 있는 작은 문으로 향했다.

들어올 때의 불편함과 인위적으로 의식을 협소하게 만들었던 그 작은 문만이 유일한 탈출구였고 목적지라는 생각에 제발, 부디, 빨리, 그 곳에 닿기를. 도착하는 순간까지 바라고 바랐다.


스치는 발걸음에 닳아서 움푹 파인 문지방을 건너

가로등 밑에 도착한 후 동기 녀석이 지 깐에는 두렵지 않았다고 너스레를 떨며

"해가 지고 달이 뜨기 직전이 영이 등장하는 시간이야"라고 내뱉었다.


"뭐야? 무섭게에!!!"

남동생보다 가깝게 지내던 녀석에게 무한대의 등짝 스매싱을 날리면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던 순간.

안도감을 느끼며 우리 모두 크게 웃었다.


"야, 너 저번에 집에 가다가 무서운 얘기 생각나서 뛰어갔다고 하지 않았냐?'

"그 얘긴 왜 해? 잊고 있었는데! 아이 씨"

"겁도 많으면서"

"조심해라. 이번엔 진짜 따라올지도 모른다"

"야!!"

"하하하하하"


가로등 밑에 서서 한참을 웃으며 숨을 고르면 문 저쪽의 캄캄한 수목원 길을 지나온 순간은 마치 일어나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휴대폰을 뺏어 통화기록과 메세지를 일일이 확인하며 읽어내려가던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트집 거리를 찾으며 쉬지 않고 떠들던 쇠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해가 뜨기 직전까지 상기된 얼굴로 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누구와 연락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소리내서 읽고 있는 그를 보며,


이제 끝났다


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남은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집에서 나갈 수도 없다는 생각에 모든 의식이 마비되어 버린것 같았다.


나갈 방법이 없다.


유일하게 내 선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밤에 깨어 있는 것이었다.

창 밖으로 멀리 록키 산맥이 보였다.

아주 멀리 있지만 달려도 달려도 닿지 않을 만큼 멀리 있다고 했다.

길 건너 눈에 덮여 하얗게 변한 나무 한 그루가 거의 바닥까지 가지를 늘어뜨린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반짝반짝하며 눈이 날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 뒤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단독주택들이 몇 채 늘어서 있었다. 도시는 매 년 가장 아름답게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주택을 선정해서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마음으로 아름답게 들어오지 않고 머리 위에서만 맴돌았다.


아름답다

는 것이 투명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차갑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평가로 전달되었다.


밤에 깨어있는 동안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을 내는 그 나무를 바라봤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눈에 보이는 유일한 것이었다.


아름답지만,

저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는 구나.

아직 공터로 남아있는 주택 부지가 그 나무 뒤로 황량하고 초라하게 보였다.


네가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아름다운 가지들을 흔들흔들 나부끼면서 너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갈 수 있을 텐데.


네가 나무가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는 어떡하지?

얘야. 우리는 앞으로 어떡해야하지?


밤이면 나는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자지 않고 깨어서 창 밖으로 나무를 봤다.

볼이 빨간 아이가 깊이 잠들어 있는 침대에 앉아서.


아이로 인해 잠시나마 사랑, 기쁨으로 가득찼던 마음에 투명한 유리창이 한 겹 두 겹 세워지고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 빨간색 현관문을 열고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이차선 도로를 건너면 저 나무 앞에 서서 바람결에 날리는 반짝이는 눈조각이 얼굴을 스치는 차갑고 찬란한 순간을 느낄 수 있지만.

유리창 안쪽에 앉아서만 보고 상상할 수 있는

나의 처지.


그래, 그가 말한 대로 나는 이대로 생각도 마음도 잃고 속이 빈 껍데기가 되어 가겠다.

이렇게 침대에 앉아서 창밖만 바라보게 되겠지.

투명한 유리창이 얼음처럼 곳곳을 파고 들어 갇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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