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조각을 잘라

노랗고 밝은 M

by 은의 정원

콜택시가 도착했다.

백팩에 기저귀와 갈아입힐 옷, 젖병을 쑤셔넣고, 종이 가방에 분유통과 가방에 담지 못한 옷을 담아 나왔다.

분을 이기지 못한 채 내 두 다리를 주먹으로 내리치던 그 여자가 아이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들어간 방으로 쫓아와 내 뺨을 갈긴 후였다.

"왜?"

뺨을 때린 후 나의 표정을 살피는 빼꼼한 두 눈을 나도 노려봤다.


"저, 맞고는 못 살아요. 한국 돌아갈게요"

더 이상 나눌 얘기가 없었다.

언어와 정서적 폭력만 행사하던 그들이 드디어 물리적 폭력의 벽을 넘어섰다.

그 때 이 집에서의 나의 시한은 끝이 났다.

참는다면 그 다음은 상상한대로 될 것이다.


아이와 내 여권을 담아두었던 주머니를 들고 이층으로 내려왔다.

겨울 방학을 보내려고 아이들 데리고 와 있던 그의 누나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

택시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고 있는데, 예의 순진한 목소리로

"지금 어디 가려고? 진정해. 엄마도 진심은 아니야"


제 엄마 뒤에서 온갖 불평을 쏟아내며 나에 대해 험담하고 이간질을 하던 입술로 다시 나를 다독였다.

가증스러운 것들

택시는 이십분 후면 도착한다고 했다.


"언니, 시어머니한테 맞아본 적 있어요? 저 맞고는 못 살아요. 좀 전에 다 보셨잖아요"


"엄마도, 마음이 여리셔서 그래"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위 층에서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당황한 채 허둥대고 있을 모습이 그려졌다.


"공항에서 가까운 호텔로 가주세요"

"좋은 호텔로 가고 싶어요? 아니면 저렴한 곳도 괜찮아요?"

"아무곳이나 괜찮아요"

"그럼, 내가 알고 있는 저렴한 호텔이 있어요. 거기로 갈게요. 숙박해 본 적은 없지만 지나가면서 봤을 때 나쁘지 않았어요"

"네"

"그런데 밤시간에 왜 집에서 호텔로 가요?"

아랍계 택시기사는 아기를 안고 집을 나서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mother-in-law가 때렸어요"

"한국 사람이예요?"

"네"

"같이 살았어요?"

"네"

"그렇구나. 그런 일이 많이 있더라구요"

"많이?"

"한국인 시어머니 힘들어요"


가로등이 드문 드문 있는 국도를 달렸다. 도로는 달리는 차가 없이 한산했다.

몇 시쯤 되었을까. 8시? 9시가 채 되지 않았다.

작은 호텔 정문 앞에서 택시가 멈췄다.

"행운을 빌어요"

"감사합니다"


호텔 직원이 안내한 객실은 복도식 아파트처럼 객실 현관이 건물 외곽을 향해 있었다. 오래된 미국 영화에서 이런 객실로 들어가는 주인공이 침대 옆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 화장실에서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주인공이 모습을 바꾸는 사이 주변을 에워싼 추격자가 총을 난사에 유리창이 깨지고 벽과 문으로 난 총구멍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던 장면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침대에 아이를 내려놓고 분유를 타려고 보니 보온병이 비어 있었다. 아이를 안고 리셉션으로 가서 뜨거운 물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나오면서 자판기에서 파는 컵라면을 한 개 샀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어젯밤에 뱅 둘러 앉아 내 휴대폰을 뒤져보던 그들에게 지쳐 새벽까지 앉아 있다 하루종일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다. 나무로 된 바닥을 통해 아래층 거실에서 그들이 밥을 먹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모두 들렸다. 일상적인 대화 안에 나의 존재는 없었다.

밥을 먹고 올라온 그의 어머니가 내가 누워 있는 방 옆의 화장실로 들어와 내가 가장 좋아하던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의 부재로 인해 평안해진 것일까?

이 집에서 나의 위치는 그림자여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이 집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그들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수도관을 타고 들어온 듯 손가락 관절이 마비될 것처럼 차가운 물로 밥을 짓고, 청소기를 돌리고, 엎드려서 걸레질을 하고, 1층과 3층을 오르내리며 빨래를 하고 옷을 개켜 나른다. 한겨울 유격훈련을 하는 기분이 드는 창고에서 옷을 갈아 입고,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이 날 줄 모르는 힐난과 잔소리를 공기의 일부인양 듣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에 굳은살을 열심히 만들어야 한다.


"쟤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기로 작정했나 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네"

침을 튀기며 등 뒤에서 뱉어내는 말에 내색하지 않기 위해 씽크대 앞을 지키고, 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바라봐야 한다.


살기 위해 그들 안으로 들어가려고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내려갔다.

저녁상을 차리고 사과해야겠지.

잘못한건 그냥 내 존재가 아닐까?

쌀을 씻고 있는데 나를 계단에 선 그 여자가 불렀다.


"너 올라와 봐"


그 여자와 그의 딸이 나란히 앉은 앞에서 또다시 모진 소리를 들었다. 쇠된 목소리로 쏟아붓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주먹으로 내 두 허벅지를 내리쳤다.

돌덩어리같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 순간 얼이 나간채 그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뒷 목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허기조차 느끼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냈는데, 그들이 없는 낯선 공간에서 아이와 단둘이 있다는 생각에 뭐라도 먹고 싶어졌다.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컵라면의 짭짜롬한 냄새가 견딜 수 없이 식욕을 자극했다. 유리병에 든 분유를 꿀꺽 꿀꺽 마신 아이가 컵라면의 국수를 탐냈다. 이유식을 시작했기에 분유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양념이 밴 국수를 물에 씻어 아이의 입으로 넣어줬다. 조금 매웠는지 입 주변이 빨갛게 올라오는데도 사양없이 쪽 쪽 빨아먹고 있었닫. 컵라면 한 개를 거의 먹고난 후 아이는 신기한 듯 방 안의 이것저것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침대와 스탠드 뿐이 방에서 놀이감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뭔가 먹을 수 있는 곳을 있을까?

입을 다시는 아이도 무언가 먹을것을 찾는 눈치였다.

"분유밖에 없는데... 우유 먹을래?"

"우우 우우"

"아니야?"


호텔 직원은 길 건너편에 맥도널드가 있다고 했다.

아이를 앞으로 안고, 횡단표시도 없는 이차선 도로를 무작정 건넜다.

사람도 차도 없는 길. 검은 아스팔트, 가로등이 없는 검은 공기.

길을 건너면 노란색의 선명한 빛을 찾을 수 있겠지.

익숙한 간판이 한 눈에 들어오겠지.

나무에 가려져서 안 보이나?

이차선 도로를 한 번 더 건넜다.

소음조차 없는 거리. 공허한 거리에서 아이를 두 팔로 꼭 안았다. 따뜻했다.

잠들지 않고 새근새근 웃고 있는 아이.

이대로 이 도시에 갇혀 버리는 것은 아닐까?

호텔 방에 여권을 두고 나왔는데.

연말에 일어날지도 모를 범죄에 대비하라며 수배자 수십명의 사진을 한인 뉴스 페이지에서 봤는데.

체구가 작은 동양인 여자와 15개월의 아기가 이 아스팔트 위에서 사라지는 것은 큰 일이 아니겠구나.

놀드 스트롬으로 가던 길 마약중독자들이 휘청이던 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가 지고 거리를 어슬렁대던 그들의 모습을 달리는 차창 안에서 바라봤는데, 어쩌다 그들 사이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포기가 아닌, 무기력과 무력함으로 나를 포위하려 했다.

검고 짙은 아스팔트는 냉기가 어둠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검게 변한 어둠의 시간. 중력만이 발을 딛고 선 거칠고 딱딱한 아스팔트가 바닥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늘어진 가지조차 보이지 않아 부딪힌 후에야 비켜갈 수 있는 어두운 대기가 포기할 권리도 사라졌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나는 그래도 살아봤어.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수 많은 일을 겪어봤어.

기쁘고 행복한 순간도 많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도 견뎌봤어.

그 모든 순간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너에게 그런 선택권이 있을까?

너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두렵다. 엄마가 가장 무서운 건 네가 삶을 빼앗기게 될 까봐.

할 수 없음의 절망. 그게 우리의 삶이 될까 두려워.


저 멀리 드디어 노란색의 선명한 M이 보였다.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의 구세주같은 노란빛을 향해 잰 걸음으로 나아갔다.


다행이야.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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