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김이 아닌 계산된 소비
한국형 고액자산가(HNW)에게 명품은 더 이상 감성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전략적 소비의 일부이며, 때로는 자산 방어의 수단이다. 이들은 한정판 시계나 가방을 구매할 때, 브랜드의 철학이나 장인의 손길보다는 시장에서의 희소성, 향후 리셀 마진, 그리고 물건을 보유함으로써 얻게 될 '포지셔닝'에 더 주목한다. 본질적으로 한국형 HNW의 명품 소비는 자기만족보다 생존형 지위 유지에 가깝다.
이들은 명품을 즐기지 않는다. 명품을 관리한다.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관하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한다. 실제로 주요 백화점 VIP 고객 중 다수는 수백, 수천만 원의 명품을 구입한 직후 바로 금고에 넣는다. 그들이 찾는 건 착용의 기쁨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오르는 프리미엄이다. 명품은 ‘지금’의 사치가 아닌, ‘미래’의 가치를 위한 매입이라는 논리 속에 작동한다.
이러한 소비 태도는 한국형 자산가가 가진 독특한 심리 구조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자산을 ‘잃지 않기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다. 부동산과 주식, 금과 달러를 오랫동안 관리해오며 '보유의 기술'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명품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그 결과, 명품은 스타일이나 라이프스타일의 일부가 아닌, 포트폴리오의 한 축으로 전락한다.
가방 하나를 고를 때도 그들은 묻는다. “지금 안 사면 얼마가 더 오를까?” “이건 몇 개 한정이야?” “중고 시세는 얼마야?” 이 질문들은 명확하다. 그들은 명품을 통해 ‘자기 표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치 보존’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보존은 단순히 현금 흐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건 그들의 지위 유지이자, 자산가 커뮤니티에서의 존재 증명이며, 때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시적 유산이기도 하다.
한국형 HNW의 이러한 소비 성향은 한국 명품 시장의 판을 바꿔놓았다. 브랜드들은 이제 감성 마케팅보다도 ‘희소성’과 ‘품절 전략’을 앞세운다. 구매는 경쟁이 되었고, 소비는 전투가 되었다. 오픈런, 대기줄, 사전예약, 리셀가 역전 현상 등은 모두 이들의 계산된 움직임을 반영한다. 이 세계에서 ‘좋아 보여서 샀다’는 말은 순진하게 들릴 정도다.
그렇다면 한국형 HNW는 왜 이런 소비를 지속하는가. 그것은 단지 이익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계산을 통해 성공을 축적해온 세대다. 감정보다는 구조에 익숙하고, 미적 가치보다는 숫자의 움직임에 더 반응하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명품은 단지 ‘브랜드’가 아니라, 브랜드를 활용해 자산가임을 증명하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전략적 소비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사치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주는 명분’이기도 하다. "이건 그냥 가방이 아니라, 자산이야." "이건 나를 위한 선물이 아니라, 아이를 위한 투자야." 이러한 자기설득은 한국형 HNW가 가진 내면의 긴장감—소비에 대한 경계와 사회적 시선—을 완화시켜준다.
결국, 그들은 사치를 하지 않는다. 사치를 위장한 투자를 한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합리'이며, 동시에 그들만의 방어다. 이처럼 한국형 HNW의 명품 소비는 단순한 시장 현상을 넘어, 그들의 정체성과 생존 방식이 집약된 하나의 문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