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설계하는 한국형 HNW의 폐쇄적 성향
한국형 고액자산가(HNW)를 이해할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은, 이들이 관계 맺는 방식 자체가 소비만큼이나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사람을 만나는 일’조차 이들에게는 신중한 판단의 연속이다. 이들이 새로운 인맥을 형성하거나 모임에 참석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는 누구 소개로 왔지?”
한국형 HNW는 결코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경로로 이 사람이 내 앞에 도달했는가에 따라 태도와 대화의 깊이가 결정된다. 이들이 신뢰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연결된 맥락’이다. 예를 들어, 같은 청담 와인클럽 멤버, 같은 병원 원장 지인, 자녀가 같은 국제학교에 다니는 학부모 등—이런 ‘끼리끼리의 접점’이 확보되어야만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이러한 성향은 단순한 보수성 때문이 아니다. 기존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한국 사회는 부자에 대한 시선이 양가적이다. 따라서 이들은 관계조차도 ‘방어적으로 설계’한다. 누군가가 자신과 가까운 사이가 되면, 그 사람의 행동이나 언행이 결국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네트워크 안에서의 신뢰와 평판을 무척 중요시하며, 새로운 관계가 아니라 ‘검증된 연결’을 선호한다.
더 나아가, 이 관계 설계는 단순히 사람을 만나는 것을 넘어서 ‘누구와 함께 있는가’라는 연출에도 적용된다. 고급 식당,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조차 이들은 혼자 가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있는 사람이 그들의 ‘포지션’을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 누구와 여행을 다녀왔는지, 누구 소개로 프라이빗 전시에 참석했는지는 단순한 만남의 기록이 아니라 사회적 위계 구조 내에서의 좌표 설정이다.
이러한 ‘끼리문화’는 폐쇄적이면서도 안전지향적이다. 오랜 시간 쌓인 평판을 기반으로 한 신뢰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은, 아무리 능력 있고 유능한 사람이라도 해당 네트워크에 속해 있지 않으면 경계한다. 다시 말해, 실력보다 소속이, 성과보다 연결성이 중요하게 작동하는 세계다.
고액자산가 대상 마케팅이나 관계 설정을 시도할 때, 가장 먼저 설계되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안심할 수 있는 ‘관계적 출처’다. 이 맥락에서 '소개(referral)'는 단순한 추천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그것은 고액자산가 세계에 입장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입장권이다. 그들은 오직 신뢰받는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서만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즉, 어떤 인연이 어떻게 연결되어 왔는가가 전부다. 이들에게 있어 소개는 개인의 실력이나 브랜드보다도 우선시되는 신뢰의 보증 수표다. 실제로 어떤 초청장이든, 그 끝에는 항상 같은 질문이 붙는다 — “누구 소개로 왔지?”
한국형 HNW는 정보를 폐쇄적으로 공유하고,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하며, 관계를 하나의 자산으로 인식한다. 그들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이고, 그 질문에 신뢰로 답하지 못하면 시작 자체가 어렵다. 이것이 바로끼리문화의 핵심이고, 그들이 관계를 설계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