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만 마시면 인생영화가 뭐냐고 물어보는 친구가 있다. 그럴 때면 난 항상 같은 대답을 한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일본 영화야."
그럼 친구는 인상을 찌푸린다.
"요즘 다른 애들도 퍽하면 다 그 영화가 인생영화라고 하더라? 난 그거 제목부터가 별로야. 혐오스럼 인생이란 말이 맘에 안 들어."
취한 친구는 매번 같은 영화를 얘기하는 데도 매번 같은 이유로 싫은 모양이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2007년 작품이지만 나는 수능이 끝난 2011년 겨울에 이 영화를 접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독하게 불행한 여자가 여러 번에 걸쳐 마주하는 비극을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서, 그리고 영화의 결말에서 나는 온종일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마츠코의 조카의 시선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도쿄에서 한량처럼 사는 조카가 '혐오스러운 마츠코'라고 불리던 고모가 죽게 되어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교사이던 그녀가 왜 이토록 불행한 삶을 살다 죽었는지 일련의 사건들을 마주하는 내용이다.
영화의 줄거리나 스틸만 보면 왜 이런 영화를 많이들 좋아할까 싶을 것이다. 지금 봐도 애니메이션스러운 효과가 많아서 깊이 있는 영화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래도 이 영화를 보고 긴 여운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많다는 것은 아마 마츠코의 인생에 나를 투영하는 순간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우울증에서 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영화를 봤다. 처음 접했을 때보다 10년이나 흘렀고, 영화는 나온 지 15년이 된 오래된 영화가 되어버렸다. 마츠코 씨의 인생은 여전히 답답이 고구마 불행 투성이었다. 그래도 마냥 어리지 않은 나이가 되니 그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불행의 고개를 넘고 넘는 와중에도 마츠코 씨의 가슴에 남은 꿈과 희망이었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내용을 많이 얘기할 수는 없지만 마츠코의 낮은 자존감이나 남자 의존성이 아니라 그녀의 인생 자체를 놓고 보려고 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을 불행이 찾아와도 마츠코는 계속해서 삶을 살아간다. 밑바닥 인생이 되어도 사랑을 찾고, 희망을 품고, 다른 일을 시작하고, 또 사랑에 빠진다.
불행의 크기만 다를 뿐, 그녀가 우리의 인생과 별반 다른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물론 우리는 불법적인 일들을 하진 않지만) 상처받고, 슬픔을 느끼고, 비극을 맞이하며 살아간다.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 사랑을 만나고, 희망을 가다듬는다. 인생이 다 끝난 것 같아도 아직 다 살아본 것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은 우울하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다 해도 마츠코처럼 언젠가 다시 일어나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뭘 해도 마츠코 씨보단 나은 삶을 살 수 있진 않을까?
마게테노바시테~ 오호시사마오츠카모오~
まげてのばしてお星さまをつかもう
구부렸다 몸을 쫙 펴서 별님을 잡아보자
오랜만에 글을 쓰다 생각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의 OST를 흥얼거려본다.
미완성의 혐오스러운 삶을 산 마츠코의 인생이 미완성의 삶을 사는 나에게 오늘 또 한 번 위로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