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숍 창가. 2시간이나 일찍 퇴근 후 오래간만에 남자 친구 회사 앞으로 왔다. 12년 차 장수커플인 우리는 농익은 와인처럼 꽤나 담백했다. 이런 담백한 사이에서의 이런 서프라이즈 라니 오래간만에 뭔가 스파크가 튈꺼같은 설렘을 안고 달달한 라떼를 홀짝이며 커피숍 창가를 바라보았다.
"어라? 저 새끼 뭐 하는 거지?"
창밖을 보던 나는, 우연히 시선을 돌렸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12년 동안 내 옆에 있던 남자, 정확히 말하면 내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 여자를 마치 편의점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1+1 맥주를 득템한 사람처럼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분명 사랑에 빠진 사람의 미소였다.
문제는, 그 표정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게 딱 7년 전, 그가 생일 선물로 나에게 명품 지갑을 받았을 때였다.
나는 순간, 뇌와 심장이 동시에 블루스크린에 걸린 기분이었다. 팔에 힘이 풀려서 라떼 거품이 내 코에 묻었는데도, 닦을 정신조차 없었다.
“와.. 드라마 대사 같네. ‘내 눈으로 네 바람을 목격했어.’”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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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집에 돌아온 나는 온갖 생각에 휩싸였다.
그 어린애 누구야? 당장 따져 물어볼까?
“12년을 사귄 나한테 이럴 수 있냐!” 하고 울면서 바닥을 굴러야 할까? 아니면 그냥 모른 척 지나가야 할까?
별의별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재생되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낮에 봤던 그 반짝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피곤에 절여진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신발을 대충 차버리며 투덜댔다.
“왜 오라 한 거야… 오늘 피곤한데…”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아, 이 남자에게 나는 이제 귀찮은 존재구나. 더 이상 사랑은 남아 있지 않구나. 12년이라는 시간이 한순간에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구차하게라도 확인은 하고 싶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 여전히 사랑해?”
그는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사랑은 무슨.. 정이지”
그 순간, 내 안에서 뭔가 툭 하고 끊어졌다. 정? 그래, 정이라면 낡은 운동화 같은 거지. 신으면 편하긴 한데, 설레지는 않고 버리자니 아깝지만, 새 신발만큼 반짝이지도 않는 그런 거 말이다. 근데 내가 원한 건 운동화의 편안함이 아니라, 다시 뛰게 만드는 그 짜릿한 설렘이었다. 더는 사랑을 확인받고 싶지도,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담백하게 말했다.
“나, 오늘 낮에 네 회사 앞에 갔거든. 근데 네가 어떤 여자랑 아주 드라마처럼 서로 안고 있더라. 너 그 여자랑 뭐야? 사귀는 거니?”
그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그냥 회사 동료야. 별거 아냐. 오해하지 마.” 입술은 그렇게 움직였지만,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는 점점 불편해하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미안해.. 솔직히 말하면, 너랑은 이제 더 이상 설레지가 않아. 이제는 그냥… 가족 같은 느낌이야. 그래서.. 아니.. 어쩌다 보니.. 다른 사람이 내 마음에 들어왔어. 처음부터 너랑 이렇게 정리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하다.”
그는 12년이라는 긴 시간을 끝내는 고백치고는, 어느 것 하나 확실히 말하지 못한 채 비겁하게 도망쳤다. 마치 편의점 앞에서 흘린 영수증처럼, 그 오랜 세월이 구겨져 발에 밟힌 듯 허무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그 순간, 내 심장도 같이 닫힌 것 같았다. 정적 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뭐야, 이 쉬운 놈은.. 12년의 세월이 라면 끓이는 시간보다 허무하게 끝나다니. 라면은 최소 3분이라도 끓여야 제맛인데, 우리의 연애는 긴 시간의 끝마저 거창한 대사도 아닌, 허술한 사과 하나로 잘려 나갔다.
“이씨! 뺨이라도 한 대 쳐줬어야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더 어이없다. 연애 초반에도 나한테 머리 쓰다듬어준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내 머리카락은 12년 내내 방치였는데, 그 여자 머리는 뭐라고 그렇게 소중한 보물 다루듯 쓰다듬냐고!
정말, 제일 억울한 건! 내 머리카락이 단 한 번의 손길도 못 받고 이별을 맞이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