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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졌다고 동네방네 알린 날

by 오리세상

12년.

그 오랜 시간을 통째로 지워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그날 밤 완전히 멘붕에 빠졌다. 연애 이력서가 있다면, 내 경력 칸은 줄줄이 꽉 차 있을 텐데, 이제 한 줄로 정리된다.

'12년 연애— 대. 실. 패.'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세상이 조용히 흔들리는 것 같았다. 12년을 허비했다는 속상함, 그리고 그런 놈과 당연히 결혼할 거라며 안일하게 생각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와.. 나 진짜 뭐 했냐..” 허탈한 혼잣말이 입에서 흘러나왔고, 궁상맞은 눈물이 자꾸만 솟구쳤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12년의 연애가 끝났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아침이면 출근을 했고, 퇴근하면 여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달라진 게 있다면, 매일 저녁 알리의 365일을 틀어놓고 텅 빈 마음을 와인과 소주로 채우려 애쓰는 나 자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추석은 짧으니까, 그냥 정현이네 갔다가 집에 오지 말고 쉬어.”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느 순간부터 늘 당연하다는 듯 명절 코스가 정해져 있었다. 그놈 집에 먼저 들렀다가, 우리 집에 오는 순서. 나는 며느리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그 집의 며느리처럼 전을 부치며 허리가 끊어지도록 고생했고, 그놈은 우리 집에서 결혼도 안 한 사위 주제에 밥상을 당연하게 받아먹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화딱지가 치밀었다. ‘아, 헤어질 때 지난 명절 아르바이트비라도 받아낼 걸…’ 괜히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난 헤어진 줄도 모르고 날 배려해 주는 엄마한테,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나.. 정현이랑 헤어졌어.”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받아들이기 힘든 소식이 엄마의 가슴을 눌러앉은 듯,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나를 더 불편하게 했다. 마치 엄마가 내 상처를 대신 앓아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참 후, 엄마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힘겹게 말했다.


“힘들면 내려와라.”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남은 건, 가슴속에서 오래 맴도는 엄마의 한숨뿐이었다.

그날, 나는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12년의 연애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고 알렸다. 고맙게도 친구들이 곧장 달려와 나를 달랬다. 우리 셋은 모여 와인잔을 돌리며, 마치 수학여행 밤처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와인잔이 세 번째 돌 무렵, 친구 민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솔직히 말해서 잘된 거야. 그놈 진짜 별로였어. 12년은 아깝지만, 결혼해서 그런 꼴 보는 것보다 지금 정리한 게 훨씬 낫다!”
“맞아.” 혜진이 잔을 부딪치며 거들었다.
“나도 5년 사귀었던 남자랑 헤어질 때 세상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다 괜찮아지더라. 오히려 그 뒤에 남편 만나서 잘 살고 있잖아.”


나는 와인 한 모금을 털어 넣고 중얼거렸다.

“뭐.. 너희는 결혼이라도 했지. 난 인생 실패자지 뭐. 12년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차라리 웨딩드레스라도 한 번 입어봤으면 좋았을 걸..”


친구들이 안타깝게 웃자 나는 더 씁쓸하게 덧붙였다. “아.. 몰라 이제 난 평생 혼자 늙어 죽겠지..”


혜진이 거칠게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야, 뭔 소리야. 뭘 평생 혼자 늙어 죽어!!”

민지는 역시 와인잔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잘라 말했다.
“야! 넌 똥 안 밟고 자유 얻은 거야. 그놈이랑 결혼했으면 넌 영원히 전 부치기 종신 계약 맺고 살았을걸?”


나는 괜히 억울해서 피식 웃었다.

“하긴.. 언젠가부터 명절마다 난 걔네 집 노예였어. 그놈은 우리 집 와서 소파에 퍼질러 TV만 보고.. 진짜 내가 호구 중 호구였네. 와, 갑자기 열받는다.”


혜진이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왜 그런 놈이랑 12년이나 버틴 거야?!”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결혼을 해마다 미룰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 거울 보니 나는 나이 든 노처녀가 돼 있더라고. 진짜 게임하다가 ‘레벨업’ 대신 ‘노처녀 업’만 된 느낌이랄까?”


민지가 한숨을 쉬더니 와인잔을 번쩍 들었다.

“됐어! 이제 네 앞에 훨씬 더 괜찮은 사람 나타날 거다. 너 지금 ‘인생 재부팅 버전 2.0’ 시작이야.”


나는 잔을 돌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은 사람? 있으면 뭐 해. 내 또래 남자들은 다 유부남인데.. 회사만 봐도 전부 와이프랑 애들 이야기뿐인데.. 나만 시집 못 간 고인 물이거든. 그것도 썩은 고인 물 말고, 푹 삭아서 약간 발효된 고인 물!”


그러자 민지가 바로 맞받아쳤다.
“야, 발효면 된장이지. 된장은 오래될수록 맛있고 귀한 거야. 넌 그냥 프리미엄 된장녀라고 생각해.”
혜진도 잽싸게 거들었다.
“아니면 빈티지 와인! 숙성될수록 비싸지는 거 몰라?”

셋은 동시에 빵 터졌다.
순간만큼은, 내 ‘발효된 고인 물 선언’이 오히려 웃음의 안주가 되었다.


우린 한참을 박장대소했고 쓸데없는 이야기와 전 남자 친구 흉을 보느라 한참을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나를 채웠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집 안에 다시 정적이 찾아오자, 그 허무함은 어김없이 밀려왔다. 불 꺼진 거실에 홀로 앉아 있자니, 방금 전까지 깔깔대던 웃음소리조차 꿈처럼 아득했다.

“그래.. 결국엔 혼자네.”


나는 와인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며칠 뒤, 퇴근길.

핸드폰이 진동이 울렸다. 민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야, 나 고민하다가 결국 보낸다. 소개팅 자리 하나 있는데… 생각 있어?]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화면만 멍하니 바라봤다.

12년 만에 다시 듣는 단어, ‘소개팅.’


곧이어 두 번째 메시지가 이어졌다.

[부담 갖지 마. 그냥 밥이나 한 끼 먹는 거라고 생각해. 집에만 있지 말고, 기분 전환 좀 하자.]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소개팅이라.. 내가 아직 그거 할 수 있긴 할까? 메뉴 고르는 것도 힘든데, 사람 고르긴 더 힘들 거 같은데..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답장을 보냈다.
[그래, 뭐. 한번 나가보지 뭐.]

나는 폰을 툭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집에 있으면 천장만 세다가 잠드는 거잖아. 차라리 나가서 사람 구경이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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