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카페에 도착한 나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12년 만에 처음 나선 자리였다.
“그래, 뭐. 그냥 사람 구경이나 해보자.”
애써 쿨한 척하며 나왔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기대도 했다. 혹시라도 영화 같은 우연이 펼쳐지지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했다.
테이블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리며 창밖을 보는데, 마음속을 짓누르던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는 듯했다.
‘그래, 인생은 아직 길잖아. 오늘이 내 두 번째 챕터의 시작일 수도 있지.’
하지만 소개팅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사람 구경이나 해보자” 했던 쿨함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괜히 시켜놓은 아메리카노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컵 속에는 이미 김도 다 빠져버린 미지근한 커피가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속으로 쏟아붓는 내 꼴이 꼭.. 시험 전에 괜히 문제집만 계속해서 다시 펴는 수험생 같았다.
그때였다.
카페 문이 열리고, 소개팅남이 들어왔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정장 바지에 하얀 셔츠, 정돈된 머리까지—첫인상만큼은 꽤 반듯해 보였다.
나는 괜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식어버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내 소개팅 상대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역시 나를 보자마자 알아챈 듯 주저함 없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강민이라고 합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깔끔하게 인사했다.
나도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맞받았다.
“아, 네. 반갑습니다. 김주연이라고 합니다.”
그가 자리에 앉고 커피가 나오기 전까지,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나는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가볍게 물었다.
“주말인데 여기까지 오시는데 불편함은 없으셨어요?”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아, 뭐 좀 멀긴했지만 괜찮았습니다. 주연씨는 주말에 보통 뭐하세요? 전 원래 주말에는 자기 계발하는 편이에요. 헬스도 가고, 책도 읽고. 시간 낭비하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요. 제 인생은 제가 설계하는 마인드라 하하”
내 대답은 듣지않고 자기말만 내뱉는 그를 보며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와.. 첫 대화부터 자기 관리 어필이라니. 이 분, 분명 회사에서도 자기 얘기만 하실 듯. 주말인데 갑자기 회의 소집당한 기분 드는 건 착각이겠지?
그렇게 자칭 ‘자기계발남’과 몇 분간 겉도는 대화를 주고받은 뒤, 그는 슬슬 본심을 꺼냈다.
“주연 씨, 근데 나이가 몇 살이라고 하셨죠?”
순간, 내 등골이 싸해졌다. 아,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든다. 내가 조심스레 나이를 말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확신에 찬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면 확실히 노산이겠네요. 아무리 운동을 해도 여자 난자는 나이를 못 속여요.”
..네?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노산? 노산이라고? 소개팅 첫 질문이 출산 가능성 체크라니.
그는 내 표정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요즘은 다 난자냉동 하던데.. 주연씨도 당연히 하셨죠?”
나는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음, 아뇨. 전 안 했는데요.”
그러자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마치 내가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계획성이 없으시네. 준비도 안 하고 어떻게 결혼을 하려고 그래요? 결혼 생각은 있긴 있는 거예요? ”
와. 이 남자, 혹시 산부인과 의사인가? 아니면 내 난자 보안관이라도 자처하는 건가? 아니, 난자 냉동을 안 했다는 이유로 왜 내가 이런 심문을 당해야 하는 거지?
나는 속으로 피식, 차갑게 웃었다. 소개팅 나온 줄 알았는데, 잘못해서 산부인과 상담실에 접수한 건가?
그는 대답 없는 나를 두고 어느새 강연 모드에 돌입했다.
“여성분들은 나이 들어서 후회하지 말고, 미리 대비해야 돼요. 제 동창들도 다 그렇게 하거든요. 주연 씨는 너무 안일한 것 같아요. 결혼하면 아이도 가져야 할텐데 그 나이대 난자로는......”
나는 속으로 필기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12년 만의 소개팅에서 듣는 단어가 ‘노산, 난자냉동, 후회’라니. 이건 소개팅이 아니라 건강검진 상담이잖아.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내 표정은 싸늘하다 못해 점점 일그러졌다. 그제야 내 기색을 살펴본 그는 잠시 흠칫하더니, “아, 전 주연씨 걱정돼서 하는 말이였는데...”라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변명은 변명일 뿐. 그가 계속 떠드는 동안, 나는 조용히 내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12년 만에 용기 내서 나간 소개팅. 결과는 ‘난자 강연남과의 60분.’ 리뷰: ⭐ 0.3 / 5. 재방문 의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