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자 강연남과 소개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불 꺼진 방 안, 형광등 불빛 아래의 내 얼굴은 왠지 낯설었다. 눈 밑에 진 그림자, 미세하게 늘어진 입가.
“맞아.. 나 늙었네.. 노산 걱정해줄만하네..”
나는 거울에 비춰진 초라한 내 모습을 보며 조용히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 남자가 말했던 ‘노산’이라는 단어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분 나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나.. 정말 늙은 걸까?매일 일하느라 정신없이 살아온 사이, 내 얼굴이 이렇게 변했나 싶었다. 거울 속에는 예전보다 눈 밑이 조금 더 어둡고, 웃을 때 생기보단 피로가 먼저 느껴지는 내가 있었다.
그래서 김정현, 그 인간도 나보다 더 젊고 생기 넘치는 여자한테 간 걸까?그 생각이 미끄러지듯 들어오자, 괜히 가슴이 쿡 내려앉았다. 화도 나고, 서글펐지만 또 한편으론 인정하게 됐다. 세월은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주름이 되고, 누군가에겐 눈빛의 온도가 된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혜진이었다.
[야, 어땠어? 괜찮았어?]
나는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몇 번 쓰다 지웠다.
뭐라고 써야 할까. ‘노산, 냉동난자, 후회’ 삼종세트를 들었다고?결국 짧게 보냈다.
[음.. 나랑은 좀 안 맞는 거 같아.]
몇 초 뒤, 혜진의 답장이 바로 왔다.
[응? 야, 한 번 만나보고 어떻게 알아. 사람은 몇 번 봐야 알지~]
나는 그 말을 한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혜진의 말투엔 늘 현실적인 조언과 약간의 답답함이 섞여 있었다.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결국 아무 말 없이 대화창을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진동했다. 혜진이었다.
답이 없는 내가 답답했는지 전화가 왔다.
“야, 왜 답 안 해? 무슨 일 있었어?”
나는 한쪽 볼에 손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그냥.. 피곤해서.”
혜진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뭔데 말해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일단.. 그 남자, 첫 대화가 ‘노산’이었다?”
“노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응. 만나자마자 나이 물어보더라고.. 그러더니
‘아, 그러면 노산이네’ 이러더라. 그 다음엔 냉동난자 얘기하면서 왜 준비 안 했냐고 혼내더라고.”
소개팅에서의 일을 이야기 하자
혜진의 목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미친 거 아냐? 그게 사람 상식이야?
나 진짜 그런 남잔 줄 몰랐다. 미안해..”
나는 괜히 혜진이 흥분하는 게 웃겨서 피식 웃었다.
“괜찮아. 인생 공부한 셈 치지 뭐.
내 난소 건강도 다시 생각하게 됐고.”
혜진은 한참 ‘아휴 진짜 세상 왜 이래’라며 푸념을 늘어놓더니,마지막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너무 위축되지 마, 넌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야. 알지?!”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말이 따뜻했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켠이 시렸다.
괜찮은 사람.. 근데 요즘 그런 말, 위로보다 유효기간 지난 쿠폰 같단 말이지.
며칠 뒤, 민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주연아 괜찮아? 혜진한테 들었어. 지난번 그 남자 완전 노답이었다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뭐 소개팅이 아니라 산부인과 상담이었지.”
민지가 킬킬 웃더니,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내 남편 회사 동료중에 너무 괜찮은 사람이 있더라고~완전 반전 스타일이래. 자상하고, 따뜻하고, 어른들한테 그렇게 잘한데~.”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어른들한테 잘한다라..
그 말이 조금은 걸렸다. 그래도 스스로를 달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른들한테 잘하면.. 마흔 살 먹은 어른이인 나나, 우리 부모님한테도 잘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스스로 김치국을 한 사발 들이키며, 괜히 힘주어 대답했다.
“그래, 민지야. 진짜 괜찮은 사람 같네. 한번 만나볼께 고마워~”
그렇게 나는 또 한 번의 소개팅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이번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래, 이번엔 진짜 괜찮을 수도 있잖아. 어른들한테 잘하는 따뜻한 사람이라잖아.
소개팅 장소는 지난번보다 조금 더 격식 있는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조용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자리. 나는 긴장 반, 기대 반으로
미리 도착해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뿔테안경에 반듯한 셔츠, 말쑥하게 빗은 머리로
왠지 모르게 누군가가 챙겨준 느낌이 물씬 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정도윤이라고 합니다.”
나는 밝게 웃으며 악수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김주연입니다. 반갑습니다.”
그가 자리에 앉고 메뉴판을 펼치며 말했다.
“주연 씨는 매운 거 잘 드세요? 저희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매운 음식은 위에 안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나는 멍하니 웃었다.
“아.. 네, 뭐 가끔은 괜찮아요.”
“아, 그래도 너무 자극적인 건 피해야겠죠? 음, 그럼 메뉴는 이걸로 시킬게요~.”
그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로 메뉴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또 한 번, 그분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어머님이 늘 그러세요. ‘위장은 한 번 상하면 평생 간다’고. 그러니까 주연 씨도 매운 거나 자극적인 거 너무 드시지 마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 번째 ‘어머님’ 등장. 나는 속으로 조용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 주연 씨는 부모님이랑 자주 뵈세요?”
“가끔요. 요즘은 바빠서 자주는 못 뵈어요.”
“아, 저는 매일 봐요. 어머님이 혼자 계셔서요.
퇴근하면 꼭 들러요. 저녁도 같이 먹고요.
사실 오늘도 원래 어머님이 된장찌개 끓여주신다고 하셨는데 소개팅이 있어서.. 하하”
..세 번째.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셋. 좋아, 아직 참을 만해. 세 번까진 인내심 영역이야.
그런데 그는 물잔을 내려놓고 덧붙였다.
“주연 씨, 어머니가 이런 말씀하셨거든요.
‘착하고 단정한 여자가 최고다’라고요.
오늘 주연 씨 보니까, 어머님 말씀 진짜 틀린 거 하나 없네요. 주연 씨는 참 참하고, 어른들께 잘할 것 같아요.
제 어머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하하.”
나는 순간, 마시던 물이 기도로 역류할 뻔했다.
와, 이제는 아예 ‘미래의 며느리 후보’ 인증식이야?
그는 당황한 나를 눈치도 못 채고 말을 이어갔다.
“전, 어머님이 혼자서 절 키우셔서..그래서 어머님께 잘할 수 있는 여자를 찾고 싶었어요. 요즘은 그런 분이 잘 없잖아요? 근데 주연 씨는 왠지 느낌이 제가 찾던 그런 사람 같아요 하하”
“글쎄요...”
내 속에서 무언가 ‘퍽’ 하고 터졌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잔을 내려놨다.
이 사람은 지금 나랑 소개팅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의 새로운 베스트 프렌드를 모집 중인가?
그는 내 반응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전히 행복한 미소로, 본인 어머님의 철학을
줄줄이 읊어댔다.
“우리 어머님은요, 늘 그러시거든요. 사람은 효심이 기본이라고. 그래서 전, 그런 마음이 있는 여자가 제일 좋아요.”
그래, 효심. 아주 훌륭하지.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터졌다.
어른들한테 잘한다더니, 세상 모든 어른이 아니라
너네 집 한 분, 그 ‘어머님’한테만 잘하잖아!
이건 뭐… ‘어머님 바라기 종신제’야 뭐야?!
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어머니’라는 단어가 몇 번 나왔는지 세는 걸 포기했다. 열 번은 넘었을 거다.
그 순간, 속으로 외쳤다.
됐어. 그만!
이건 소개팅이 아니라 ‘어머님 찬양 세미나’야!
어른들께 잘한다는 따뜻한 남자와의 소개팅 결과는,
자기 엄마한테만 잘하는 걸로 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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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방문 의사? 당연히 없음.
그냥 평생, 너희 어머님이랑 행복하게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