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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몇 바퀴 돌았을 뿐인데

<멈출 수 없는 달리기에서 건져 올린 하루>

by 무명치의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이 문장을 볼 때마다, 내 머릿속은 괜히 복잡해진다.

좋은 말 같긴 한데, 뭔가 미묘하게 어색하다.


물리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속도(speed)와 속력(velocity)은 다르다.

속력은 단순히 거리 ÷ 시간이라는 값이고, 속도는 여기에 방향까지 포함한 벡터값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은,

사실상 “인생은 속력+방향이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이 된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인생에서 '속력'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풀어서 쓰면 이해가 훨씬 쉽다.




인생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이다.


아마 많은 사람이 원래 문장보다 이렇게 쓰는 편이 더 직관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속력이라는 건 결국 일정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이, 얼마나 멀리 움직였는지를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걸 조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지구는 태양을 공전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전도 한다.

지구가 태양을 한 번 공전하는 데 걸린 시간을 1년이라고 하고,

지구가 한 번 자전하는 데 걸린 시간을 1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구가 365번쯤 자전할 때, 태양을 한 바퀴 돈다.

사람들은 자연의 주기를 통해 시간이란 개념을 약속하고 산다.


그런데 이 약속은 어느 순간부터 채찍이 됐다.

지구에서 태어나고 나서 태양을 20바퀴 돌 때쯤, 대한민국에서는 대입이라는 걸 한다.

25바퀴쯤 됐을 때, 대입을 못 했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뜬다.

30바퀴쯤 됐을 때,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다시 물음표가 뜬다.

태양을 몇 바퀴 돌기 전까지 결혼을 해야 하고, 몇 바퀴 돌 때까진 집을 사야 한다.

지구가 태양을 몇 바퀴 돌 때마다 뭔가를 이루어 내지 못하면, 혼자 고립되어 살아야 한다.




자연의 시간은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런데 인간의 시간은 비교와 심판의 기준이 되어, 나 자신과 타인을 채찍질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일정 거리를 달리지 못하면, 교류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마치 이런 기준들은 마치 육상 코스에 있는 가상의 결승 테이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누가 그 결승선을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지구에서 태어난 후, 지구가 태양을 200바퀴쯤 돌 때면 납골당에도 없고

300바퀴쯤 돌 때면 분자 단위로 흩어지게 된다.

그런 탄소 기반 생명체가 서로를 향해 달리라고 외친다.

중간에 쉬면 게으르다 하고, 멈추면 실패자 취급을 한다.

이런 상황은 2000년 전 이미 분해된 탄소 화합물 선배가 비웃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문제는 나도 그 틀 안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다는 거다.


시간은 자연스럽게 흐르지만, 나는 부자연스럽게 달리기를 했다.

속력을 모를 때도, 방향을 알 수 없을 때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달렸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이미 깊숙이 각인돼 있다.

잠깐 멈출 땐, 남보다 먼저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


인생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도, 와닿지 않는다.

속력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고, 하루하루 버티는 게 전부인 날이 많다.

굳이 말하지만 인생은 속력도 방향도 아닌, 하루하루 살아내는 아이러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가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아닌,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냈는가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글을 쓰며 오늘을 살아낸다.







치과에서 우리들끼리 (치과의사, 직원, 가끔 환자분께) 쓰는 말 6


마취 관련 2

1. 전달로 할게요.

- 깊게 찌르는 마취를 할 거라 긴 주삿바늘을 끼워 달라는 말이다.

2. 침윤으로 할게요.

- 얕게 찌르는 마취를 할 거라 짧은 주삿바늘을 끼워 달라는 말이다.

(위) 전달 마취용 바늘, (아래) 침윤 마취용 바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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