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술에 빠진 사람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셔서 거나하게 술을 드시고 반듯한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어떤 술주정도 없으셨다. 어린 손자의 눈에도 그 모습은 강렬했다.
여든이 훌쩍 넘으신 아버지도 여전히 술을 좋아하신다. 매일 반주를 드시는 술상엔 반드시 어머니가 차려주신 안주가 곁들여져야 한다. 오십여 년이 흐른 동안 아버지의 술주정이나 술 취한 모습 또한 본 적이 없다. 처음 술을 배울 때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서 술을 어떻게 먹어야 되는지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고. 술을 먹었을 때나 안 먹었을 때나 한결같아야 된다고 가르쳐 주셨다. 가르침을 잘 받아 실천하고자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정작 술 좋아하고 잘 마시는 유전자는 물려주지 않으셨기에. 다행인 건 애주가인 딸이 두 분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창때는 술을 잘 마시고 싶어 꾸준히 노력했다. 얼굴이 빨개졌지만, 많이 마시다 보면 적응이 될 줄 알고 술자리에서 빼는 일도 없었다. 어느 순간 술을 마시면 숨이 가쁘고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술은 먹는다고 느는 것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술과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언젠가 동료들과 전주에 출장 갔다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반주로 '모주'를 마셨다. 알코올 도수는 1도였다. 달짝지근하고 걸쭉한 게 감칠맛 났다. 모두들 이건 술이 아니고 보약이라며 맛있게 마셨다. 잠시 후, 모주가 술임을 나의 얼굴이 증명했다.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알코올이 조금만 들어가도 표가 나는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농 초기에 마을 이장님과 이웃들 다섯 집이 자주 만났다. 낯선 곳에 들어온 젊은 농부를 살갑게 대해 주시는 마을분들의 마음씀에 고마워하며 즐겁게 어울렸다. 무난하게 정착해서 텃새 없이 지내는데 그분들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늘 술이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먹지 못한 술을 계속 권하는데 거절도 어려워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낮부터 술을 마시고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다른 마을 분들과 마주친다. 이유가 어찌 됐든 젊은 사람이 대낮부터 얼굴 시뻘게져 돌아다니는 모습은 흉보기에 딱 좋고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맞춤이었다.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자주 어울리던 그분 들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실은 술을 한잔도 못한다고. 그냥 주신 술을 거절할 수 없어 받아 마셨는 데 정말 힘들다고.
그날 이후 더 이상의 부름은 없었다. 마을의 어느 자리에서도 술을 권하지 않았다. 술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어떤 모임이나 자리에서도 술은 한잔도 못한다고 자신 있게 선언했다.
술을 안 마시니 자연스레 저녁시간이 자유로워졌다.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주로 일과가 끝나는 저녁시간에 술을 먹는다. 술자리가 끝나고 헤어지면 끝이다.
시골은 술을 먹는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다. 술을 먹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어제저녁에 한잔 했으니 해장으로 한잔,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 꾸물하니 한잔, 오늘은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먼저 먹고 시작하자 해서 한잔, 오늘은 먹지 말아야지 했는 데 새참을 먹는 곳에서 굳이 불러 한잔, 수확한 작물을 수매로 넘기고 두둑한 주머니에 기분 좋아 한잔, 일은 많은 데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아 술의 힘을 빌려야 해서 한잔, 별로 탐탁지 않은 사람한테 자존심 긁어대는 말을 들어서 한잔, 점심 먹을 때는 오전에 고생했고 오후일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한잔, 그렇게 마시고 나면 저녁 시간은 더 서운하고 허전하다. 괜스레 술 한 잔 하자는 전화를 기다리며 마음은 초조해진다. 역시나 술꾼들의 마음은 통한다. 여지없이 불러 낸다. 그래서 거나하게 한잔.
술을 먹지 않아 가장 좋은 건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가장 힘든 게 맨 정신으로 술 먹은 사람들 이야기 듣는 것이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언성은 높아지고, 과장되고 헛된 말들을 신나게 떠들어 된다. 가장 아까운 시간이다. 강한 거부감이 드는 건 못 마시는 사람에게 기어이 한잔을 강권하며 마시게 하는 것이다. 주폭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분 나쁘거나 불만이 쌓여 푸념을 늘어놓고 싶으면 술의 힘을 빌린다. 술의 힘으로 견디며 극복하려 하지만 술만 깨면 도루묵이다.
지역에서 유난히 술을 좋아하고 즐겨했던 형님들이 예순을 조금 넘어 며칠 사이로 먼 길을 떠나 셨다. 술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은 진리다. 사람이 술을 먹고 술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다는 말도 진리다. 동서고금에 술 먹고 건강 좋아졌다는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혼자 귀농하면 안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술이다. 낮에 힘들게 일하고 일과가 끝나면 지치고 허전한 마음이 밀려든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와 긴 저녁 시간을 무료하게 보낼 순 없다. 겨우 차린 밥상에 곁들여진 반주는 홀짝홀짝 잘도 넘어간다. 외로움도 달래주고 서러움도 보듬어 준다. 잠도 잘 온다. 매일을 술이라는 친구와 함께 한다. 술을 먹는 양은 늘어나고 술병은 쌓여간다. 주변에서도 어찌 알고 술친구나 하자고 자주 불러내고 어울린다. 아침이 밝아 와도 일터로 나가는 게 귀찮고 힘들어진다. 점점 늘어지게 자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러다 몸도 마음도 아파 온다. 결국 다시 떠난다. 이런 경우는 다반사다.
우리 사회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희귀한 경우다. 대부분 즐기며 마시는 술을 먹지 않는다고 술 먹는 사람들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술을 먹는데 가장 어려운 게 적당히 마시는 것이다. 각자가 다른 주량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여 마시는 것 자체가 불공평하다.
주량은 맥주 100cc, 소주는 한잔, 막걸리도 한잔인 사람이 술에 대해 뭘 안다고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지 멋쩍다.
술 취한 사람의 주정 보다 맨 정신인 사람의 훈계나 잔소리가 더 듣기 싫은 것도 잘 알면서.
그래도, 더운 여름 아내와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는 것은 순간의 행복이다.
술을 마셔 건강도 좋아지고 가정이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술을 마셔 돈도 벌고 진실한 친구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술을 마셔 인생이 즐겁고 행복했노라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을 보고 싶다.
모든 애주가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듬뿍 사랑받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