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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Jan 07. 2024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경계

변하지 않는 사람의 존재

늘 그 자리에 있다. 1년 365일 변함이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다. 어느 시간을 지나도 그는 그대로다. 변함없는 그의 모습은 시간을 멈춰 세운 듯하다.


15년 전, 이름도 정겨운 강산리라는 마을로 들어왔다. 운명처럼 주어진 정착지였다. 농장 이름도 강과 산의 순우리말인 가람뫼로 지었다. 기르던 강아지 이름도 강과 산이었다.

청주 한 씨 집성촌인 마을에서 같은 성씨를 가진 처가덕을 톡톡히 봤다. 항렬도 일치했고 장인어른과 성함이 같은 분도 계셨다. 처음 살게 된 시골에선 작은 인연이나 사소한 연결고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 씨족사회에서 혈통관계는 보증수표다. 이 또한 행운이었다.

앞에서 본 마을 풍경


마을은 읍내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읍내와 가까울수록 장점이 많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거나 관공서에 업무를 보러 갈 일이 수시로 발생한다. 부담 없이 훌쩍 다녀올  수 있어 편하다. 읍내와 가깝지만 집과 농장은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마을 앞의 하천은 쉼 없이 흘러 금강으로 스며든다. 하천을 건너면 꽤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오랜 전부터 하천은 흘렀고 들판은 존재했다. 말무덤이라 불리는 이 들판은 천 오백 년 전, 치열했던 삼국의 격전지였다. 마을 왼편은 백제군의 주둔지였던 노고산성의 흔적과 병사들이 마셨던 우물이 남아 있다. 오른쪽 대각선 방향엔 성곽 건립의 역사와 형태가 잘 보존된 신라군의 요충지, 삼년산성이 있다. 두 나라의 병사들은 성곽을 나와 들판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역사의 부침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 패전국인 백제의 산성은 돌무더기의 잔해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자고 나면 나라의 주인이 바뀐 삼국의 접경, 역사의 흔적은 무수한 세월을 흐르고 흘러 이 지역민들만의 독특한 정서로 드러난다.

마을 앞 들판 (오른쪽 산 중턱, 하얀 부분이 '삼년산성')


이사 왔을 때 마을 분들의 환대를 잊을 수 없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좋다며 맛있는 게 있으면 나눠 주셨다.

서툰 농부의 어설픈 농사일을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셨다. 무슨 일이든 모르는 게 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해 주려 애쓰셨다. 지역에 적응할 수 있게 필요한 모임에 다리도 놓아주었다. 바람막이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분들 덕분에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강산리의 강산도 세월 따라 빠르게 변했다. 봄이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장관을 이루던 조그만 야산이 어느 날 사라져 과수원이 되었다. 마을 입구에 있던 사과 과수원 자리엔 거대한 창고가 들어섰다. 논들이 사라지고 다양한 건물들이 도열하듯 자리했다. 집들은 뒤로 밀려나고 산은 개발되어 전원주택지로 변했다. 새로 들어온 주민들은 마을에 스며들지 않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보청천'


마을을 지키던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도 여기저기 잘려 나갔다. 우람하고 기세 좋던 모습을 기억하며 어떻게든 오래오래 남아 있기를 빌어본다. 느티나무 정자아래 지팡이를 짚고 꼿꼿이 앉아 계시던 어르신은 어느 날 홀연 듯 자리를 비우셨다. 이사 와서 반갑고 고맙다며 찾아오신 아주머니 세분은 봉투를  건네주셨다. 액수를 떠나 지금도 그 마음의 무게를 잊을 수 없다. 그분들도 모두 먼 길을 떠나셨다. 가만히 앉아서도 천리를 보셨던 아저씨는 정작 당신의 갈길은 보지 못하셨는지 어느 해 겨울 허망하게 잠드셨다. 모든 걸 아저씨께 의지하셨던 아주머니도 남편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몇 달 뒤 정처 없는 길을 가셨다.


흙길은 포장이 되고 포장된 길은 다시 아스팔트가 깔렸다. 허물어져 가던 집은 멋진 벽돌집이나 목조 주택으로 변신했다. 지붕을 교체하고 새롭게 벽을 두르면 따뜻하고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허물어진 집도 많고 떠나간 사람도 많다. 시간은 사람을 속절없이 떠나보내고 문명은 빠르게 흡수했다. 사람이 떠나간 자리엔 늘 새로운 것들이 채워진다. 화려하고 멋지게 채워진 공간은 빈틈이 없다. 비워진 공간은 순식간에 채울 수 있지만 떠나간 이들의 빈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자고 나면 변하는 강산이다. 무수히 많은 시간을 그렇게 흘러 왔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기억은 존재의 확인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은 함께 남는다. 변하는 것은 추억 속에 남고 변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어느 해 보다 따뜻한 겨울이지만 오늘 아침은 추웠다. 일찍 길을 나섰다. 변함없이 그는 마을 앞에 나와 있다. 털모자에 두툼한 점퍼를 입고 있다. 차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는다. 하루 중 가장 밝고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해 준다. 나만 보면 가장 크게 웃고 좋아한다며 마을분들이 인정했다.


그의 하루는 단순하다. 해가 뜨기 전 집을 나오고 어두운  밤에는 형광색 조끼를 입고 서있다. 잠을 자기 위해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알 수 없다. 그의 활동 반경은 직선이다. 마을 중간쯤 있는 집에서 대로변까지 직선으로 내려온다. 가끔 분리수거를 위해 수레를 끌고 나오는 발걸음은 당당하다.

그의 나이는 정확히 모른다. 나는 그를 형이라 부르고 그도 나를 형이라 부른다. 나는 그에게 서툰 반말을 하지만 그는 나에게 존댓말을 한다. 나는 말로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지만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자신의 마음을 보여준다. 가끔 민망한 행동을 하지만 그만의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인다.


차가운 겨울밤, 가로등 불빛은 변함없이 꿋꿋하다. 새벽이 밝아 오고 가로등이 잠들면 그는 어김없이 마을 입구에 나와 있을 것이다.

변하는 것의 중심엔 시간이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의 중심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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