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게 둥글게
하나 둘 운동장으로 모여든다. 이른 시간이지만 모두 밝은 표정들이다. 약속된 시간에 운동은 시작된다. 비가 많이 와도, 폭설이 내려도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몇 명이 나오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팀은 나누어진다. 신나고 땀나는 빅매치는 그렇게 시작된다. 둥근 공은 모두를 포용하며 하나 되게 한다.
두 시간여를 웃음과 함성과 땀으로 가득 채운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다양한 모임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 모임의 종류 또한 셀 수 없이 많다. 혈연, 지연, 학연은 기본이요 각종 취미와 취향에 따라 모임이 만들어진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도 많다. 형식과 만남의 형태는 달라도 모임의 지속과 끈끈한 유대를 위해서는 체계와 규범이 필요하다.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가고 유지해 나가기 위해선 갖춰야 할 요건들이 많다.
인구가 많지 않은 이곳에도 무수히 많은 모임들이 있다. 한 사람이 많게는 몇 십 개의 모임에 가입돼 있다. 연말에 송년회를 하면 한 달 내내 이어진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이 속한 모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 무늬만 회원인 경우나 개인의 사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가입한 사례도 많다. 처음엔 뭔가를 바라고 가입했다가 여의치 않으면 소홀히 참여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무성한 뒷말이 오가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며 그저 그렇게 지내게 된다. 무늬만 회원인 사람들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힘을 빠지게 한다.
귀농 후, 지역에 있는 조기 축구에 가입했다. 워낙 축구를 좋아해 빠지지 않고 나갔다. 어디서든 축구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기에 회원들과 금방 친해지고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것도 즐거웠다. 지역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만큼 회원수도 많고 직업도 다양하고 화려했다. 실력 또한 천차만별, 운동이 시작되면 선수 쟁탈전도 치열했다. 이기고자 하는 마음들이 차고 넘쳤다. 그러다 보니 서로 험한 말들이 오가고 못하는 사람에 대한 비난과 힐난이 난무했다. 친목을 도모하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인 운동이 오히려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는 쌓이고 불편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지역에서의 활동들도 왕성해 어떤 이슈를 놓고는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더 이상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과감하게 탈퇴했다.
함께 나온 몇 명과 따로 만나 축구를 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운동은 그 자체로 생활의 윤활유였다. 차츰차츰 소문이 나며 인원이 늘어났다. 분위기 좋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진실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 누구나 함께 하고 싶어 했다.
무명의 팀이 탄생했다.
모임에 이름이 없다. 회장도 없고 총무도 없다. 정기적인 회비도 없고 형식적인 회식도 없다. 구성원도 정확히 특정되지 않았다. 연령대는 10대 초반부터 60대 후반까지 다양하다. 6년 동안 어떤 다툼이나 반목도 없다. 운동 끝나고 먹는 늦은 아침은 각자 밥값을 내거나 돌아가면서 한 번씩 계산하는 데 눈치 보지 않고 서로 내려고 한다. 그냥 나오면 되고 만나면 즐겁다. 모두가 자발적이다. 시스템은 자연스레 갖춰지고 형성됐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며 솔선수범한다. 지역에 이상한 축구팀은 그렇게 굴러간다.
일주일에 한 번, 매주 토요일 아침 7시에 만나 축구를 한다. 어느 땐 인원이 많아 정규구장이 좁을 정도다. 네 팀으로 나눠서 할 때도 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자유롭게 운동한다. 누구든 축구를 하고 싶으면 그 시간에 그곳으로 오면 된다. 대학 진학이나 취업을 해서 타 지역으로 떠난 젊은 친구들도 언제든 고향에 오면 맨 먼저 달려온다. 군복무 중에 휴가를 나와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가끔은 외국인 노동자도 함께 한다.
좋아서 즐겁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다. 굳이 한 가지 암묵적 규칙이 있다면 분위기를 저해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바로 아웃이다. 욕설이나 거친 태클등 이기적이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만둔다. 강제하지 않아도 자신의 그런 언행이 이곳에선 맞지 않다는 걸 깨닫고 부담스러워 나오지 못한다.
어떤 조직이나 모임을 유지하고 끌어가는 것은 엄격한 규칙이나 규율이 아니다. 아무런 제약이나 규정이 없어도 마음이 맞고 배려하며 목적에 충실하려 한다면 그 조직은 왕성하게 움직이는 유기체가 된다.
자발적 참여만큼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모임 유지 방법은 없다. 함께 해서 즐겁고 행복하면 된다. 함께 해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만남은 선물이다. 즐거움은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진다. 사람이 사람을 데리고 오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어제 아침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다. 눈보라도 몰아 쳤다.
우리는 운동장에 모여 축구를 했다. 수능을 끝낸 수험생과 기말고사를 치른 대학생들이 함께 했다.
68세, 형님도 거뜬히 나오셨다. 독감으로 고생한 목사님도 골키퍼라도 하겠다며 동참했다. 추위와 감기도 함께 땀 흘리며 웃고 즐기는 시간 속에 사라지고 치유된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시간의 경계는 무의미 해진다. 둥근 공이 말해 주는 건 모두 둥글게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무명의 축구팀은 나이의 많고 적음도 신분의 높고 낮음도 부의 많고 적음도 실력의 좋고 나쁨도 그 어떤 편견과 차별도 없이 둥글게 둥글게 어우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