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품 주의
날씨가 굽굽해서 밖에 나가기 싫다. 물론 잘 나가지 않는 집돌이지만 어쨌든 말이다. 장마가 한창일 때면 <날씨의 아이>처럼 비가 그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해본다. 세계가 물에 잠기고 홍수가 나고 노아의 방주가 실현되고 하는 망상을. 의미 없다. 그냥 온난화라도 좀 멈춰줬으면 하지만, 세계 어디선가는 화창할 거다.
세계는 이원화되어 있다고 한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 단순한 진리 말이다. 빛과 어둠의 공존처럼. 어려서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어른이 되니 아이가 되고 싶다. 어른이 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로 믿었는데 그렇지 않아서일까. 자꾸만 나태해지고 덜 마른 빨래처럼 축 늘어진다. 빨래가 잘 마르질 않을 날씨가 창문 밖으로 보이니, 어째 더 기분이 다운된다.
일기장을 다 썼는데, 바꾸고 싶지가 않다. 이상하게 오래된 것에 정이 든다. 정확히는 내가 오래 쓴 것. 에어가 있는 내 나이키 신발은 노견처럼 느껴지고 다 쓴 일기장에서 일기를 이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뭐가 옳고 아니고를 논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그런 상태다.
어떤 교수의 강의에 B0를 받았다. 처음으로 받아본 비제로. 하라는 것만 해도 주는 게 비플러스였는데, 상상평에서 비제로를 받아버렸다. 성적도 장학금도 모두가 낙담했다.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나는 당당하게 말했지만 막상 비제로를 받으니 기분이 나쁘다. 교수를 탓할 순 없지만 괜스레 욕짓거리를 하고 싶다. 이 조차도 웃긴 거지만
블로그를 꾸밀 줄 모르니, 일기로만 계속 써야겠다. 아직 아날로그가 더 익숙한 탓인지 노트북으로 끄적거리는 일기는 낯설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느낌이랄까. 옛날 송승언 시인이었나, 자기는 아직 사무용 컴퓨터(노트북인가)를 쓴다고 했다. 4:3 비율의 모니터가 글 쓰기 제격이라나, 비율이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어쨌든 그런 맥락이었다.
아마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가는 글이라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일 거다. 그때도 그런 얘기를 했던 거 같은데, 벌써 스무 살 때 일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손으로 쓰는 글은 생각보다 빠를 수 없다. 펜을 그렇게 빨리 쓸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타자는 다르다. 원고지에, 노트에 쓰던 글이 요즘의 아이들한텐 상상도 하기 어렵겠지.
스무 살까진 손수 글을 썼는데, 23살엔 노트북을 마련했어도 한 동안 노트에 글을 썼는데, 24살이 된 지금엔 노트북이 없으면 안 되게 됐다.
익숙해져버린 것에 대해 어떠한 느낌도 없다. 소중함에 속아 익숙함을 잊지 말자, 이런 맥락이 아니니까. 아니, 어쩌면 그런 컨텍스트일지도 모르겠다. 텍스트를 짜내기 위한 용의 노트북이 내 몸엔 너무 익숙해져버렸다면, 노트와 펜에 대한 소중함을 잊은 거니까.
교보문고에서 만든(사실 잘 모르겠다) 창작의 날씨가 있다.
여기서 글을 쓰는데 아무도 읽어주질 않는다. 정확히는 시인데, 일부로 수상 받은 작품들만 올리는 중이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비롯된 거다. 아무도 궁금하진 않겠지만, 링크를 첨부해본다.
블로그에도 글을 올리고, 창작의 날씨에도 올리고, 독립출판사 마저에서 진행하는 에세이라니 글 쓰고, 요즘은 글복이 터졌다. 이것도 노트북이 있으니 금방이지만.
+ 지금은 브런치로 갈아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