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일기는 아니고
<고등래퍼>를 보셨나요. 기억에 남는 학생들을 뽑으라면, 김하온, 이로한, 이병재 등의 이름이 불리겠죠. 그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뽐냈고 각자의 실력을 인정받아 방송이 끝나고 하온이는 하이어에, 이로한은 VMC에 갈 수 있었던 거죠. 사람들은 이런 하온이와 같은 이들을 가리키며 ‘악마의 재능’이라고 합니다. 천재를 뜻하는 또 다른 말이죠.
그런데 저는 악마의 재능이 천재를 가리키는 말보다 어중간한 재능을 가리키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고등래퍼 초반부에 나온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그들은 각자 지역 예선을 뚫은 재능의 소유자였어요. 하지만 전국구에서 그들보다 뛰어난 이들이 많아서 탈락했을 뿐이죠. 혹은 운이 따르지 않았거나.
저는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무대에 오르는 래퍼들이 부러웠어요.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는 모습에서 자격지심을 느꼈을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저는 어중간한 재능의 소유자였어요. 지역에서는 시 좀 쓴다고 생각했는데 우물 안 개구리였죠. 아무 재능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낫다고 하지만 그뿐이었어요. 제 우물을 아무리 파도 물은 나오지 않았어요. 아뇨, 그전에 지쳤어요. 전국에서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제가 좋아서 쓴 시였는데, 이걸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백일장에 나가도 상을 받지 못했어요. 이런 제가 시로 실기를 봐, 대학에 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어요. 더군다나 예술계는 더러웠어요. 문학도의 길을 걷는 아이들이 하나둘, 글을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죠. 실기 시간 내에 합격할 글을 쓰기 위해선 글을 외워 와야만 했어요. 그리고 주제에 맞춰 끼워 넣는 거였죠. 일반화하면 안 되는 거지만, 많은 학생이 그렇게 실기를 치렀어요.
고3 4월에 실기를 준비하였지만, 실기를 치를 때까지 이렇다 할 상 하나도 받지 못했어요. 백일장에서 장려상을 탈 때마다, 응원해주기는커녕 포기하라고 주변은 말했어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1차에서 떨어지는 사람들 모습에서 제가 겹쳐 보였어요. 그래, 장려가 어디야. 어느 순간 합리화가 시작되었고 소위 슬럼프가 왔어요.
그런데 포기 안 했어요. 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거든요. 제가 학교 수업까지 빼가며 시 쓰러 다녔는데, 너무 아깝잖아요. 그렇게 포기 하지 않던 중, 드디어 저만의 시를 찾았어요. 동국대 실기 일주일 전에 말이죠. 원서비 아까워서 가야지, 이런 마인드를 가졌었는데 뭔가 될 것 같더라고요. 좋은 예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그런 감정이요.
그렇게 실기 발표가 다가오던 11월에 문자가 왔어요. ‘축하합니다’라는 제목이 적힌 메시지가요. 화들짝, 놀라며 바로 확인했었는데 공모전 수상 축하한다는 내용이더라고요. 그리고 곧이어서 문자가 하나 더 왔어요. 실기 발표 결과가 나왔다고. 예정보다 일찍 조기발표가 나왔어요.
‘능소화’가 담을 넘어가자 꽃말을 얻게 되었다는, 내용의 시가 대구대 공모전에서 2등을 하였어요. 드디어 내세울 수 있는 수상을 했어요. 주변 반응이 제일 재밌었어요. 교감쌤이 제게 하던 말이 ‘쟤는 백일장 나가서 상을 못 받아’ 이였는데, 웃으면서 상장을 보여주었지요.
그리고 대망의 실기 결과를 확인하러 갔어요. 떨어졌어요. 희비가 그렇게 엇갈렸던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조울증에 걸리면 이럴까 싶었죠.
4월부터 달려온 저를 그날 처음으로 돌아봤어요. 저는 능소화의 꽃말처럼 기다리면 꽃을 피울 줄 알았어요.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물과 양분이 없으면 자라지 못해요. 제가 만약 실기를 준비하지 않고 학업에만 열을 다하였다면, 달라졌을까요. 달라졌더라도 저는 실기 준비를 후회하지 않아요. 시는 곧 저를 소개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가 되었고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걸 자랑스럽게 여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