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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Jan 29. 2024

행복과 이야기와 코미디

세 번째 일기

행복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건너야 할 여러 가지 관문들이 있었다. 일단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야만 했다. 그 다음엔 괜찮은 남자친구가 있어야 했다. 그 관계는 이왕이면 2년 이상, 적지 않은 시간 연애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면 더 좋았다. 괜찮은 인턴십 경력과 함께 졸업을 하고 싶었다. 대체로 대부분을 해냈다. 이런 관문들은 현실과는 무관한 퀘스트와 같은 것이라 하나씩 깨는 행위 그 자체에서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어떤 선택의 결과는 흐릿하게 느껴지던 또 다른 길, 그러니까 내가 생각했던 행복과는 거리가 먼 다른 길이 더 잘 사는 삶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런 선택들은 공통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직면하고 덤벼들었을 때만 가능했다. 덤벼든 이후의 상처에 대해서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만 겨우 가능해졌다. 이토록 잔인한 선택을 그 때의 내가 자주 했을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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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이는 학내 인권단체모임에서 만났다. 근처에서 꿔바로우를 먹고 커피를 한 잔 같이 마신 뒤에 우린 금방 가까운 친구가 될 것임을 서로 알게 됐다. 어떤 식의 화학작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야자시간에 교실에서 가까운 계단에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수다를 떨던 여고생들처럼 우린 공강시간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학교 외부에서 독서/영화 토론동아리를 하고 있었고, 학과 특성과 이런 외부활동들로 인해 호연이보다 남자를 만날 확률이 높았다. 그 중 경영학과에 다니던 막 제대한 I 오빠를 호연이에게 소개해줬다. 내 마음에 드는 구석은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외모에 주변 사람들에게 꽤나 친절한 편이었다. 약간 가식적이긴 했지만 불쾌하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호연이에게 I 오빠를 소개해준 후 몇 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나는 둘이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동아리 모임에서 만난 I 오빠에게 잘 되었다며 호연이한테 잘하라고 이야기했을 때 약간 찡그리던 그 표정을 잊지 않았어야 했다. 그로부터 한 두 달 정도 지난 이후 호연이에게서 헤어졌다는 연락이 왔다. 나 때문에 둘 사이가 어색해지지 않기를 바란다며, 우리는 그 전과 달라질 것이 없으니 신경쓰지 말라는 말과 함께였다. 나는 속상했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묻지 않았고, I 오빠와도 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1년 후 나는 그 동아리 모임과 학내 인권단체모임에서 모두 나왔고, 호연이는 교한학생을 다녀왔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서로의 스케줄이 어긋나는 일이 많아져 전처럼 자주 보지는 못했으나, 가끔씩 호연이가 올리는 게시물을 통해 호연이는 여전히 인권단체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이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난 뒤, 나는 학내 게시판에서 데이트 폭력에 관한 대자보를 봤다. 학벌 가스라이팅은 물론, 구체적인 성폭력 내용, 글을 쓴 사람이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적은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그 대자보는 기사에도 나왔다. 나는 많은 내용 중 글쓴이가 가장 마지막 문단에 적은 내용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나와 같은 사람이 더는 없기를 바란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나는 호연이에게 잠시 만날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는 처음 같이 꿔바로우를 먹었던 식당에서 전처럼 점심을 먹었다. 호연이는 교환학생 경험을 이야기해주었고, 높은 확률로 졸업 후 대학원에 갈 것 같다고 말했다. 자주 보지 못한 사이 몸과 마음이 모두 더 단단해져 있었다. 호연이는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 자신은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와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남자친구'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며 잠시 머뭇거리던 호연이는 최근에 게시판에 붙었던 대자보를 읽어봤냐고 물었다. 호연이가 너무도 조심스럽게 물어서 의아했지만, 나는 읽어보았고 우리가 같이 인권단체모임에서 공부했던 그때처럼 화가 난 상태로 열변을 토했다. 호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대자보를 붙인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곧이어 바로 I 오빠와의 관계가 왜 끝나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몰라 난처해하는 내게 호연이는 잠시만, 하더니 일어나 카운터에서 작은 스콘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거 같이 나눠먹자. 호연이는 그렇게 말했다.


호연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해석하고 공개하고 정리함에 이르러 내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후로 멀어졌다. 호연이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가 결국 누군가를 통해 이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호연이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멀어지는 쪽을 선택했다. 그 이후로 가끔 몰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는 것을 훔쳐볼 뿐이었다. 프로필로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만은, 나는 그 이후 꽤나 오랫동안 호연이가 같은 남자와 사진을 찍고 그걸로 프로필 사진을 하는 모습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일어난 일을 호연이는 자신의 이야기 이상으로 만든 후 마무리했다. 호연이는 가장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를 내게 공유함으로써 우리의 관계가 어긋나는 것을 얼마나 원하지 않았는지, 그 마음까지 내게 전했다. 없었던 일로 만들어 짧지만 행복했던 연애로 내게 말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글쎄, 아마도 나는 그렇게 하는 쪽에 마음이 기울었을 사람이었다. 호연이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행복에서 벗어난 다른 길을 어렴풋이 인식했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용기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가늠해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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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던 코미디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불안할수록 불행이 아닌 코미디를 생각한다. 충분한 용기로 시간을 들여 현실을 마주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일에 에너지를 쓰고 있다. 겪을 당시에는 해석되지 않는 어떤 식의 소용돌이와 감정을 기어코 코미디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현실을 직면한다는 것은 말만 쉬운 일이었다. 사실관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게 현실을 직면한 이후에는 어떠한 시련이나 고난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은 반드시 지나갔고, 지난 이후에는 코미디가 되었다. 함께 그 위기를 건너온 사람들에게서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것은 안타깝지만 어딘가 웃긴 이야기가 되어있었고, 누군가에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전혀 웃을 수 없는 일들에 시간과 용기가 더해져 조금이라도 웃어넘길 수 있는 힘을 갖게된다는 것은 이제 행복하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더 많은 코미디들을 쌓아가며 살아가고 싶을 때마다 호연이를 떠올린다. 모든 것이 코미디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는 순간에도, 괴로움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시간에도 호연이를 생각한다. 호연이는 나보다 훨씬 잘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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