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일기
이제야 내 문제를 딛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 같다. 겨우 일어서면 보일 무언가를 눈을 질끈 감고 마주할 용기도 조금은 생겼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가 나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않되 나 자신은 잊는 것, 그러한 현실에 발붙여 섬으로써 공연히 둥둥 떠다니지 않는 것. 변화무쌍했던 지난 10년의 일상들은 내게 그런 디딤돌을 마련해주었다. 나의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까지는 그렇게 처절한 변화무쌍함 속에서 몇 번의 도약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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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부터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가득 받았다. 나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잘한다고 생각했으며, 근사해보였고, 의미있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를 세상에 알리고 국제문제를 논의하는 사람이라니! 당시 '국제무대'에 대한 담론이 왕성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대학에 간다면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숙사 고등학교에서 3년을 보내는 동안 가세가 기울고 있음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토록 '커다란' 문제에 대한 관심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재수를 하게 되었을 때는 직접적으로 와닿는 이야기가 되었다. 아, 올해가 내가 엄마와 아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해구나.
시절인연이라는 말엔 어딘가 애틋함이 있다. 누군가에겐 너무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단어지만, 내겐 '우리 그랬지, 친했지, 좋았지-' 이런 느낌을 품고있는 말처럼 느껴진다. 고등학교 무렵, 그 시절 인연들은 이제 모두 떠나가버렸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마치 그때 잠시 서로에게 의지하기 위함이었음을 모두가 동시에 인정이라도 해버린 것처럼.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인연들의 연락처가 남아있다면 실수로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시절이 한꺼번에 소환되곤 한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휘몰아치는 시절의 추억이 가진 힘이 분명히 있다.
그날도 바뀐 프로필 사진들을 후루룩 보다가 아주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이름을 보게됐다. 그냥 그 이유 하나로 나는 예전 이메일 수신함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반 그 즈음으로 시간을 돌려 입시를 위해 무수히 쓰고 보냈던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 생활기록부, 친구들과 동아리 활동을 하며 주고받았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짧은 편지와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그러다 어떤 짧은 문장에서 잠시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선생님이 보기에는 너의 글은 힘든 상황에서 쓴 글이기에 힘든 사람들에게 '힐링'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아 보인다. 작가교실과 문학제에 출품했던 작품들, 개인과 팀 논문으로 썼던 내용을 정리해서 일관성과 지속성에 집중해보는 게 좋겠다."
한참 입학사정관제라는 것이 인기를 끌고 있을 무렵,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께 내가 해온 활동들을 잘 정리한 일종의 포트폴리오와 같은 것을 보내드렸다. 그때 내가 받았던 피드백 내용 중 하나였다. 찾아보니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 한동안 떠올리지 않았던 서투른 글들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비가', '꽃다울 방(芳)', '다음에는 꼭 오세요'와 같은 제목의 수필과 소설들을 찾아냈다. 그 그들은 너무나도 투명하고 투박해서 10년 전의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그 글을 썼는지까지 알게 했다. 모든 글들에는 일정한 플롯이 있었다. 남겨지고 버려진 소녀, 그 소녀가 가지는 책임감의 무게,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애정, 하지만 나아지지 않는 상황, 그래서 더 애쓰거나 끝내는 무너지는 이야기들. 하지만 너무 묵직해서 마음이 푹 가라앉는 내용들이었다. 물론 나는 그 글들로 대학에 가지 못했다. 어쩌면 대학에 가고자 쓴 글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었다. 아무런 재능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왜 막연히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고 싶었던 내가 갑자기 국어국문학과로 방향을 틀었는지, 그 이유만을 알게하는 글들이랄까.
작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만났던 누군가를 위로하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일, 그것을 업으로 삼겠다는 결심, 힘든 상황을 문학으로 이겨내려는 마음가짐과 같은 것은 너무 식상했다. 그것은 소위 '국제문제'를 다루는 일에 비해 너무나 사소했다. 그런 마음은 20대 중반이 되어서도 계속됐다.
재수의 결과로 대학에서 경제학과 교육학을 끝내 전공하고도 철학, 사회학 교양을 어마무시하게 들으며 학생회와 인권단체활동을 했던 나는 계속 그런 식이었다. 어떤 거대한 구조(정치, 경제, 사회)와 개인(문학, 예술, 교육)의 변화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방황했다. 누구는 꾸준히 한 전공을, 혹은 한 관심사를 파고 있는 동안, 나는 나의 문제와 그것을 둘러싼 세상, 그 둘 사이를 왔다갔다 오고갔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마음 속에 그 둘 사이의 경중과 위계를 나누고 있었다. 사소한 나의 경험, 그 보다 더 중요한 세상사. 둘 사이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는 와중에도 어쩐지 쉬이 사라지지는 않았던 위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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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이 언젠가부터 뭉뚱그려지기 시작한다고 느낀 순간에 나는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이후 깊게 생각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시절인연에 소환되어 그것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살펴보니 나는 초등학생 때는 영화 동아리를 하며 글을 쓰고, 중고등학생 때는 홀로코스트와 문화연구에 대한 논문과, 온갖 불행과 슬픔에 대한 수필과 소설을 썼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그래도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이런 일들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엄습해오는 불안함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불안함과, 마침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음을 인식했던 20살을 보낸 나는 줄곧 마음의 지지대 없이 20대를 시작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10대의 그런 글들 위에서 20대를 부유했을 것이다. 좀 더 정치적인 일들에 가담하며, 내가 알던 세상을 넓혀가며, 약간씩만 용감해지는 방식으로. 그러나 그 중심에 글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부유는 발산하지 않고 수렴했을 것이다. 그렇게 흘러흘러 지금에 이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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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미셸 푸코의 책 <헤테로토피아>의 서문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우리는 순백의 중립적인 공간 안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백지장의 사각형 속에서 살고 죽고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둡고 밝은 면이 있고 제각기 높이가 다르며 계단처럼 올라가거나 내려오고 움푹 패고 불룩 튀어나온 구역과, 단단하거나 또는 무르고 스며들기 쉬우며 구멍이 숭숭 난 지대가 있는, 사각으로 경계가 지어지고 이리저리 잘려졌으며 얼룩덜룩한 공간 안에서 살고 죽고 사랑한다.'
이 말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순백의 중립적인 공간에 살지 않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는 곧 세상의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는 해석될 때만 세상과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그 과정에 도달하기로 결심하기까지 지난 10년이라는 시간의 축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은 글을 읽는 독자가 있음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다. 동시에 필사적인 절실함을 가진다. 나의 문제에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글이 그 어떤 것보다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믿게 됐다. 이 과정에는 무수한 글들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쓴 글보다 보고 듣고 읽은 글이 훨씬 많았다. 부유하던 생각들은 그런 글들에 이끌려 한 곳에 마침내 자리잡았다. 결국은 떠나지 못할 나의 문제, 그리고 거기에 올바로 뿌리내리기까지의 과정에 일관되게 글이 있었다. 그러한 일관성이 있었음을 깨달은 30살의 나는 이제 곧은 자세로 다음 도약을 기다린다. 그 도약의 끝에서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