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구 Mar 03. 2024

점진적 과부하

마지막 일기

운동선수들의 경기영상을 볼 때면 만감이 교차한다. 인생이 걸린 무대가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삶, 작은 실수와 약간의 컨디션 난조로 희비가 엇갈리는 삶, 지구인들 중에 1등이 되는 삶, 그리고 국가대표 선발전과 그 4년이라는 시간을 묵묵히 견뎌야하는 삶. 어마무시하게 드는 돈과 시간, 엄청난 관리의 연속, 계속해서 불안한 상황 속에서 지속되는 훈련과 부상들. 어릴 때 해봤던 어떤 스포츠에서 생각보다 재능이 있다고 생각되었거나, 부모님이 운동을 하셨던 분이었거나, 혹은 어떤 타고난 조건 때문이었거나, 무엇이었든 결국 저 시간들을 견뎌내는 자만이 어떠한 성취를 이뤄낸다. 게다가 그 수명은 또 얼마나 짧은가. 경외 이상의 단어로 표현할 길이 없다.


-


시작이 거창한 사람들을 부러워했으나 결국 시작이 완성을 의미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근에는 완성과 성취의 다른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다. 거창하지 않은 나의 현실, 아니 어쩌면 조금 초라하다고 볼 수도 있을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나의 도움을 바라는 누군가를 매일 염두에 두면서, 나에게 의존할 수 있도록 마음과 체력의 여분을 남겨두면서, 그렇게도 완성이나 성취가 가능할까.

그러나 그것을 불평하기에는 애초에 나조차 타자에 의존하지 않은 적이 없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정말 사소한 것에서 조차 나는 오롯하게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뭔가를 사서 먹고 필요한 전자기기들을 사고 아프지 않기 위해 운동하고 너무 더러워지지 않게 집을 관리하고.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해야 하는 자리에서 입을 옷을 사고 외모를 가꿔야 하는 이런 모든 의무들을 충족하기 위한 과정 중 그 어느 하나도 자급자족할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성취란 뭘까? 심지어 이제는 뭐 하나 간단하지도 않다. 내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뭐 하나 선택하기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런 생각들이 얽히고 설켜 모두 모순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조차 뭔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상상해온 성취와는 달라야만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1등이 되거나 어떤 분야의 최고가 된다는 것과 같은 성취들과는 다른 무언가.


욕심과 야망은 간직하고 키워가되 그 방향을 잘 조정해주는 일,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씩 하는 것 이외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 말그대로 점진적 과부하의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러려면 그저 부지런한 것이 시작이겠지. 하나 말고 둘 씩 더 하고 싶어지는 날에도 꼭 하나만 더 하는 태도로, 불안해도 결국 하나씩 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조금 깨닫게 된 것 같다. 지금의 내게는 이게 최선의 해답이다.


-


연구로 꾸준히 실증적인 증거들을 수집하면서, 정말로 많은 소설가들이 하는 방식처럼, 그렇게 자료들이 쌓이고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해지거든 다시 가공된 장편의 글을 쓰기 시작하려고 한다.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섣불리 시작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지내보는 것이 좋겠다 다짐했으니. 하루에 한 번 하늘에 떠있는 별을 볼 것이지만 그것을 부러워하는 일에는 아주 적은 시간을 쓰려고 한다. 그러나 동행인을 기다리는 마음을 놓지는 않을 것이다. 되도록 많은 것에 자극받고 그런 환경에 나를 던져놓는 용기를 잃지는 않고 싶다.

이 마음으로 10년이 지난 후의 나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부유하고 있을까. 10대와 20대의 시간들로 뿌리를 내릴 곳을 찾아다니던 나는 이제 어떤 사람이 되고싶은지 무얼하며 살아갈지 더 이상은 고민하지 않는다. 이제는 과정만 남았다.


- 끝 -

이전 04화 변화무쌍함 속의 일관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