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빵 Oct 26. 2022

너의 이름은

불명의 스쿱


하나의 일이 끝이 나고 다음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른 일도 알아봐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 또 바빠질지 알 수 없으니 정기적인 일은 할 수가 없고 내킬 때 하면 되는 물류센터 일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새벽 배송으로 이름을 알린 한 업체의 물류센터에 가게 된 것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또 갈아 타 도착한 지하철 역은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유동인구가 적은 한적한 지역임에도 지하철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렸다. 이들은 모두 한 곳을 향해 걸어갔는데 그들을 따라 걷다 보니 거대한 물류센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다섯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 근무하는 이른바 미들 타임에 지원한 이들이었다.


비치된 안전화로 갈아 신고 나서 배치된 곳은 바나나가 모여 있는 공간이었다. 바나나 파트에는 하청업체의 직원이거나 적어도 직원에 준할 정도로 경력이 많은 사람이 한 명 일하고 있었다. 그가 나의 사수였다. 고객들이 주문한 많은 품목 중에서 바나나 주문만 따로 추려져 이곳으로 보내졌다. 오더지에 표기된 품목을 적혀있는 수량만큼 피킹 해 바구니에 넣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는데 한 브랜드에도 여러 가지 상품이 있고 이름도 비슷한 것들이 많아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 업체의 배송 서비스는 집에서 종종 이용한다. 평소 봐오던 물건들이기도 하니 피킹쯤이야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나나라니. 집에서 바나나를 주문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고 생긴 것도 다를 게 없는 바나나가 비슷한 포장을 하고 있으니 뭐가 뭔지 구분하는 게 쉽지 않았다. 거침없이 물건을 척척 찾아낼 거라 여겼던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멍한 얼굴의 신입만 남아 물류센터 한가운데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일곱 시 삼십 분이 되자 사수는 퇴근을 하고 파트 타임에  지원한 두 명이 바나나 파트로 합류를 했다. 이때부터 나의 주된 임무는 실속 바나나를 배달하는 일이 되었다. 바나나 파트에서 가장 주문이 많은 주력 제품이 바로 실속 바나나다. 실속 바나나 주문 중에서 일곱 봉지 이상이었던가 대량의 주문만 모아 나에게 전해졌는데 바나나 박스를 여러 개 카트에 싣고 다스라고 불리는 공정으로 배달을 다녔다.


이때까지만 해도 물류센터 일도 별 것 아니네 하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이 날이 화요일이었는데 주말까지 내리 일을 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체력이 달리면서 걸음을 떼는 것도 힘이 들었다. 실속 바나나 한 봉지의 무게는 일 킬로그램. 열두 개 들이 한 박스의 무게는 십이 킬로그램이다. 키보다 높이 쌓여 있는 더미에서 박스를 내려 대여섯 개씩 카트에 싣고 난 후 다스로 향하는 작업이 반복되면서 점점 한계에 가까워져 갔다. 안전화를 신은 발도 쑤시듯 찌르듯 아파왔다.


물류센터에는 창문이 없다. 시계도 없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들도 그랬다. 이런 곳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지고 나와 몰두할 대상만 남는다. 나와 바나나. 이 내밀한 공간으로 누군가 비집고 들어왔다. 아휴 힘들어, 아휴 힘들어. 누군가의 혼잣말이었다. 고작 최저임금에 힘들다는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올 정도의 고통을 받는 것은 과연 온당한 일인가. 젊은 그의 허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전날 열한 시까지의 주문만 다음 날 새벽에 배달되므로 열한 시가 지나면 상품을 준비하는 쪽의 일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바나나 파트를 떠나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배송 박스가 도착하는 곳으로 재배치를 받았다. 컨베이어 벨트 중간중간에 작은 컨베이어 벨트가 여럿 이어지고 그곳에서 지역별로 상자가 분류되었다. 분류된 상자는 테트리스를 하듯 팔레트 위에 차곡차곡 쌓여 꼭대기가 손에 닿지 않는 큰 사각기둥의 모양을 하게 된다. 이 기둥을 랩으로 감싸라고 했다. 기다란 막대기 끝에 업소에서나 쓸 대형 랩이 매달려 있다. 이 막대기를 들고 사각형을 뱅글뱅글 돌며 바닥부터 시작해 전체를 감싸야하는데 막대기를 아래로 들었다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하는 이 일은 이미 체력이 소진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며 상자 주위를 돌고 또 돌았다.


제빵을 하는 아내가 밀가루를 부대로 구입했다. 부대로 구입해 소분을 하면 소용량 제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싸진다는 것이었다. 밀가루를 소분하기 위해서는 스쿱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이름난 주방용품 브랜드에서는 이런 스쿱을 출시하고 있지 않았다. 스쿱의 모양과 스테인리스 강종을 보고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선택의 폭이 넓지는 않았다.


이름난 회사의 제품은 아니라고 해도 이것을 만든 회사의 이름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검색도 해보고 판매자에게 문의도 해보았지만 결국 회사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다. 국적은 중국, 강종은 SUS 304. 이것이 내가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의 전부다. 불명 혹은 미상이다. 물류센터의 일을 떠올린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류센터의 알바들은 서로를 매니저님이라고 불렀다. 사람의 노동력만 필요한 그곳에 이름은 어떤 의미도 없다. 결국은 불명이다.


한 주를 내리 일해도 되겠다던 생각과 달리 물류센터에는 다시 가지 않게 되었다. 그냥 하던 일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팔만 얼마의 알바비와 함께 그곳에서 얻은 소득이라 할 수 있었다. 안전화는 평소에 신던 신발보다 한 치수 큰 것을 신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물류센터를 다녀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오른쪽 발의 발톱 두 개에 생긴 까만 피멍 자국은 한 계절이 바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물류센터의 퇴근은 새벽 한 시다. 집에 돌아오니 세 시가 가까웠다. 이 시간에 불이 켜져 있는 곳은 편의점과 아파트 경비실 정도다. 물류센터 알바의 뒤를 이어받은 배달 알바들이 배송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은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이들의 세상이다. 미명에는 이르지 못했다. 불명의 시간이다.


이전 07화 엿장수 가위에서 현대적 가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