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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Oct 02. 2022

엿장수 가위에서 현대적 가위로

피스카스 가위


이른바 거지라고 불리는 걸인의 등장과 함께 동네 아이들에게는 비상이 걸렸다. 거지다 라는 외침은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신속하게 전해졌고 아이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자기 집으로 뛰어가 대문을 걸어 잠갔다. 너무나 빠르게 움직인 탓에 아이들은 정작 거지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고 거지가 왔다는 루머만 나돌 뿐이었다. 비상이 해제되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집안에서 바깥의 동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으므로 집으로 돌아온 식구들의 전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동네를 주기적으로 찾는 사람은 이 말고도 또 있었다. 탁발을 하는 스님들도 목탁을 두드리며 이 집 저 집을 찾았는데 아이들의 태도는 거지의 등장 때와는 달라서 대문을 잠그는 아이들이 반, 신경을 쓰지 않는 아이들이 반이었다. 한편 아이들에게 환영받는 방문객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엿장수였다.


엿장수는 고무신이나 쇠붙이 같은 것들도 등가의 엿과 교환해 주었는데 마당을 아무리 뒤져봐도 쓸만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주머니 속의 동전으로 엿을 사 먹으면서 우리 집에는 왜 고물이 없는 것일까 아쉬워했던 기억도 있다. 내 것이 작네 네 것이 크네 엿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의견은 간단히 묵살되었다. 엿장수 마음대로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엿장수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가위여서 엿장수는 리드미컬하게 가위질을 하며 엿 장사가 왔어요 한바탕 타령을 늘어놓으며 동네를 휘저었다.


전후 세대도 아닌데 나에게 왜 이런 기억이 있을까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것이 어린 시절 우리 동네의 풍경이었다. 가위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엿장수 가위 같이 온몸이 철로 된 가위는 철기시대 이후로 인류와 함께 해왔을 거라 짐작한다. 어떤 박물관에서 시퍼런 녹이 슨 가위를 본 듯도 하다. 시퍼런 녹은 구리에서 주로 생기는데 그렇다면 청동기시대부터 가위가 있었던 건가. 모르겠다. 하여간 이런 형태의 가위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그 형태에 마침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핀란드의 작은 제철소로부터 시작되었다.


1649년 설립된 핀란드 피스카스 마을의 제철소 피스카스에서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가위를 출시한 것은 1967년이었다. 그때까지는 날과 손잡이가 일체형인 금속 재질의 가위가 전부였는데 가위에 다른 재질의 손잡이를 장착한다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플라스틱의 사용을 반길 수 만은 없는 일이지만 어쨌건 이때 출시된 가위는 현대적 가위의 원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피스카스는 세계적인 회사가 되었고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피스카스 그룹은 핀란드 기업인 피스카스와 이딸라, 아리비아와 하크만 외에 스웨덴의 로스트란드,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을 산하에 두고 있다. 2015년에는 WWRD를 인수했는데 여기에는 웨지우드, 로얄 알버트, 로얄 덜튼 같은 영국 브랜드들이 소속되어 있다. 이처럼 피스카스 그룹에는 리빙 분야의 쟁쟁한 브랜드들이 모여 있지만 이 그룹을 대표하는 제품은 누가 뭐래도 피스카스의 가위일 것이다.​



피스카스에서는 오늘날까지 10억 개 가량의 가위를 판매했다는데 우리 집에 있는 가위의 수만 따져봐도 과장된 얘기는 아닐 것 같다. 집과 사무실, 교실과 공장, 상점 등 사람이 활동하는 거의 모든 공간에 가위는 필수품처럼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식당 테이블에도 가위가 하나씩 비치되어 있다. 삼겹살도 가위로 자르고 냉면 면발에도 가위질을 하며 비빔밥 재료는 아예 난도질을 한다. 왜 우리나라 식당 테이블에서만 가위가 사용될까 오래전부터 궁금했었다. 내가 아는 한 외국 어떤 나라에서도 테이블 위에서는 가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포크와 나이프로 해결을 하거나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할지언정 가위를 쓰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피스카스가 가위라는 도구의 표준을 만들고 그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업계를 주도하는 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가위를 만드는 데 첨단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오늘날 피스카스의 디자인을 봐도 엄청난 디자인 감각이 녹아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다만 피스카스 그룹의 경우를 보면 서로 연관이 있는 업종의 회사들이 모여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맹을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이딸라의 툴스 라인 론칭이 피스카스 그룹의 일원인 하크만의 유전자를 이식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시계 업계의 예를 덧붙이자면 오메가가 소속된 스와치 그룹은 대중 시계부터 고급 시계까지 다양한 브랜드의 시계 브랜드가 모여 경제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는 스와치와 오메가의 콜라보로 탄생한 문스와치가 마니아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스와치 그룹과 함께 시계 산업계의 투톱을 형성하고 있는 리치몬트 그룹에는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가 줄줄이 포진해 있다.


업종과 상관없이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문어발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는 한국식 재벌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영리는 추구하지만 선을 넘지 않고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헤리티지이며 힘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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