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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Oct 11. 2022

병실에서도 포기할 수 없어, 핸드드립

칼리타 아웃도어 핸드드립 세트


어느 날 아이가 입원을 했다.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이가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다음날 일찍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한 상황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병원 진료라 생각하고 진료실로 들어갔을 뿐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수술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고관절에 염증이 생겼고 염증에서 포도상구균이 검출되었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산 칫솔 하나만 들고 우리는 졸지에 병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가 입원한 곳이 소아정형외과 병동이다 보니 입원 환자의 대부분은 수술 환자들이었다. 수술이라는 게 보통 일은 아니어서 화들짝 놀란 문병객들이 많이도 몰려왔는데 정작 환자들은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별일 없었다는 듯 퇴원을 했다. 이인실의 한쪽 병상은 하루 이틀 간격으로 주인이 바뀌었고 우리의 짐은 점점 늘어났다.


아이는 병실에 입원을 하고 나서도 다리가 아프다며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꾸벅꾸벅 졸면서 아이가 잠들 때까지 다리를 주물렀다. 낮이 되면 상태가 나아진 아이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구석구석을 다녔다. 본관과 암 병원, 어린이 병원을 잇는 모든 경로를 파악했고 본관 지하에 교회와 어린이집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집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은 지는 꽤나 되었다. 원래도 디브이디만 연결하는 수준으로 티브이를 시청했지만 티브이가 고장 난 김에 아예 없애버린 것이 한참 전이었다. 아이를 미디어에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는데 티브이 대신 스마트 기기에 노출되었으니 그게 그거지 싶다. 아이는 집에서 볼 수 없었던 케이블 티브이의 만화 채널을 틀어 놓고 주제곡을 따라 불렀고 우리는 그제야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병원에서 파는 커피는 가격이 비싼 데도 맛은 그저 그랬다. 병원의 규모가 커서 커피숍이 여러 군데 있었지만 커피맛이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원래도 프랜차이즈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커피는 내려 마시는 게 익숙했는데 병실이라고 커피를 내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싶었다. 소심하다면 소심할 인생에서 나름 과감한 선택이었다. 우선 집에 있던 칼리타 아웃도어 핸드드립 세트와 휴대용 핸드밀을 병원으로 가지고 왔다. 아웃도어 용품은 꽤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지만 실제 아웃도어 생활은 즐기지 않아 쓸모가 많지 않았는데 드디어 적당한 사용처를 찾은 듯했다.



언제까지 입원을 할지 몰라 택배로 필터 백 매와 원두 일 킬로그램을 주문했다. 뜨거운 물이 있어야 하기에 전기주전자를 주문했고 컵을 씻는 것이 마땅치가 않아 12 온스 종이컵도 백 개를 주문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병실로 택배를 시켜도 택배는 잘 도착한다. 커피 관련 용품 말고도 택배를 많이도 시켰는데 병실에서 나갈 필요도 없이 앉은자리에서 택배를 받을 수 있어 아주 편리했다. 원두는 나중에 일 킬로그램을 추가로 주문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칼리타 아웃도어 핸드드립 세트는 뚜껑과 드립포트, 드리퍼와 드립 서버로 이루어져 핸드드립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때는 드립포트로 드리퍼에 담겨있는 원두에 동심원을 그리며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주게 되는데 이 핸드드립 세트는 방식이 아예 다르다. 드리퍼에 원두를 갈아 채우고 드립포트 역할을 하는 맨 위 칸에 일정 양의 뜨거운 물을 부어놓으면 바닥에 촘촘하게 뚫린 구멍으로 물이 조금씩 흘러나와 커피가 추출된다.


핸드드립은 그저 기계적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다. 원두의 상태를 보면서 분쇄된 커피를 불리는 시간과 물줄기의 세기,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 세심하다면 세심한 작업이다. 반면에 이 아웃도어 핸드드립 세트는 눈금에 맞춰 뜨거운 물을 부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의외로 커피 맛은 괜찮다. 어설프게 내린 핸드드립 커피보다 이 아웃도어 핸드드립 세트로 내린 커피의 맛이 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병원에 입원했던 첫날 아내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했다. 낯선 환경에다 아이에 대한 걱정까지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 생활은 조금씩 익숙해졌는데 그와 함께 피로감이 더해지며 점점 지쳐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내는 고단한 병원 생활에도 내색하지 않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 아내가 폭발한 것은 컴퓨터 침수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아내의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아이가 자판에 우유 한 잔을 몽땅 쏟았을 때 아내는 울면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아내는 겨우 진정을 했고 다시는 찡그린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병실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병원 냄새와 섞인 사람 냄새랄까. 우리가 지냈던 병실에서는 커피 향이 났다. 그것이 병실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였다. 아이는 입원을 한지 한 달이 되던 날 퇴원을 했다. 입원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퇴원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고 어두워진 하늘에 눈발이 조금 날렸던 것 같다. 칫솔 하나에서 시작해 조금씩 늘어난 짐은 자동차의 트렁크를 꽉 채우고도 모자라 조수석까지 점령을 했다. 주문했던 원두는 마침 끝을 보이고 있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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