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빵 Oct 01. 2022

카모메식당, 주먹밥, 소울푸드 그리고 스테인리스

이딸라 툴스


한때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보던 시절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일본 영상산업의 전성기라 생각하는 2000년대의 후반이었다. 지나간 드라마들을 정주행하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특급 배우들이 줄줄이 출연하는 블록버스터 외에도 소소한 이야기들을 다룬 작품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카모메 식당>이었다. 공항에서 잃어버렸다 뒤늦게 발견한 캐리어 안에 황금빛 버섯이 가득 들어있다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썩 괜찮은 영화였다.


일본인 여성인 주인공은 핀란드 헬싱키에서 혼자 식당을 시작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식당은 하나둘 손님이 늘며 결국 지역 주민들이 사랑하는 식당으로 거듭난다. 이렇듯 스토리 자체는 뻔하지만 자잘한 에피소드는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영화였다. 식당의 주인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을 하나로 엮는 중요한 계기는 만화영화 <갓차맨>의 주제음악이었다.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독수리 오형제>가 된다.


독수리는 평소 홀로 혹은 쌍을 지어 살아가다가 겨울이 되면 대여섯 정도의 무리를 지어 함께 생활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가 다섯 정도다. 그들에게는 추운 겨울을 함께 날 동료와 상대의 온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헬싱키에 간 적이 있다. 다섯 시인가 여섯 시인가 북유럽의 어둠은 일찍 찾아왔고 눈에 보이는 모든 레스토랑과 식료품점이 문을 닫았다. 네온사인 불빛조차 희미한 그곳의 길거리에서 나는 망연자실 서 있었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길 기다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도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누군가 눈이라도 마주쳐줬다면 나는 기꺼이 독수리 오형제의 일원이 될 의향이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극중 주무대가 식당이다 보니 음식이나 조리도구가 많이 노출되는데 이 식당에서 사용한 밧드가 일명 ‘카모메 밧드’라 불리며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나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런데 극중에서 이 밧드의 존재감이 그렇게 컸던가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 기억이다. 정작 내 눈길을 끈 것은 일자 선반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냄비와 프라이팬이었다. 북유럽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조리도구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만으로도 가게가 빛이 나는 듯했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데 이 욕구가 실제 구매로 이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미 다양한 용량의 냄비들이 있는지라 괜히 욕심을 부려 물건만 더 늘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스테인리스 첫 세척도 굉장한 부담이었는데 이걸 언제 기름으로 다 닦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이 물건들은 우리 집 주방에 자리 잡게 되는데 선반 위에 깔끔하게 정리된 영화 속 모습과는 큰 차이가 난다. 한 군데에 정리할 공간이 없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데다 물건을 처음 샀을 때의 느낌도 사라진 지 오래다.


1881년 핀란드의 작은 마을인 이딸라에서 작은 유리공장으로 시작한 이딸라의 주력 제품은 식기와 컵 등의 테이블웨어였다. 판유리가 아니라 유리공예를 주업으로 삼는 공장답게 디자인은 밋밋하기보단 화려했고 이러한 성향은 세라믹 제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스테인리스 키친웨어인 이딸라 툴스 라인을 론칭하면서는 이러한 면모가 완전히 바뀌는데 어떤 장식도 없이 구조상 필요한 굴곡만을 갖췄다. 바닥을 제외하고는 로고조차 찍혀있지 않다. 이것을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야 하는지 북유럽 특유의 감성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소재에 대한 완벽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좋은 디자인은 억지로 멋을 내는 것이 아니라 기능에 충실하다 보면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약간의 장식적 요소가 필요한 테이블웨어와 달리 스테인리스 조리도구라면 더더욱 그렇다.


극중 주인공의 소울푸드는 오니기리다. 우메보시를 밥 안에 넣고 뭉쳐 놓은 주먹밥은 본인에게는 익숙하지만 핀란드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북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오니기리를 만들기 위해 청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보는데 이런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을 맺는다. 많은 일본인들이 오니기리를 소울푸드로 꼽고 오랜 시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극도로 절제된 맛을 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니기리는 이딸라 툴스와 닮아 있다. 소울 냄비라고까지 말하면 과장이겠지만 하나의 냄비만 가질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딸라 툴스를 선택하겠다. 그 단순함을 나는 사랑한다.


이전 03화 너희가 회 맛을 알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