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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Sep 30. 2022

대체 불가 아이템, 소믈리에 나이프

레그노아트 소믈리에 나이프


고백하건대 고등학생 신분으로 술을 마셔본 적이 있다. 학교가 있던 지방보다 더 지방에서 유학을 온 친구의 자취방에서 한 번, 시장의 찜닭 골목 어두침침한 다락방에서 또 한 번. 술이 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실제 정신도 또렷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땅이 울렁거렸다. 땅이 상하좌우로 움직이니 넘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아야 했다.


외줄을 타는 줄꾼이 발을 재게 놀리듯 땅 위에서 스텝을 밟았다. 앞으로 두 걸음, 뒤로 두 걸음, 좌로 한 걸음, 우로 한 걸음. 결국 제자리였다. 집으로 가는 길이 길고도 길었다. 재수를 하면서는 남 눈치 보지 않고 술자리를 가졌다.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술꾼으로서의 가능성을 처음 엿본 시기였다.


진정한 음주 라이프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다양한 출신과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학생들이 술 앞에서는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하나가 되었다. 밤마다 광란의 술자리가 펼쳐졌다. 학생들이 마시는 술이라야 빤했다. 맥주는 비쌌고 막걸리는 머리가 아팠다. 다양하지 않은 주류 시장에서 남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희석식 25도 소주.


학교 앞 중국집에서의 단골 메뉴는 짬뽕 국물이었다. 빨리 부는 면은 빼는 대신 국물과 건더기가 조금 푸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짬뽕 국물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반찬으로 나오는 양파와 단무지를 춘장에 찍어 꾸역꾸역 술을 마셨다. 술자리에 있던 누군가는 군대에 가고 누군가는 휴학을 했다. 한참이 지난 후 떠났던 누군가가 돌아왔고 우리는 그 사이에도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술을 어느 정도 절제하며 마시는 법도 알게 되었고 마시는 술의 종류도 조금씩 늘어났다. 이렇게 얘기는 하지만 사실 같이 사는 사람들 눈치에  술 마시는 횟수를 줄일 수밖에 없다. 아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아이라 책잡히지 않게 항상 조심을 해야 한다. 또 소주를 마시냐는 질책을 피하기 위해 주종을 넓힌 경향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여전히 희석식 소주를 즐기긴 하지만 나이트캡으로 싱글 몰트를 마시기도 하고 밥을 먹으면서는 와인도 곁들인다. 쇼츄나 아와모리 같은 일본 술도 꽤나 취향에 맞으며 괜찮은 국산 증류주도 종종 눈에 들어온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잦다 보니 글라스 같은 필요한 물건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위스키 보틀을 비롯해 꽤 많은 물건들이 있지만 번듯한 장식장은 꿈꿀 수가 없고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에 분산 보관을 한다. 그나마 있던 와인셀러는 고장이 났고 다시 살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다. 주류 관련 용품이라는 게 대개는 없으면 없는 대로 술을 마시는 게 가능한데 와인 오프너만은 대체 불가다. 와인 오프너가 없을 때 젓가락으로 코르크를 병 속으로 밀어 넣으면 된다는 얘기가 반농담처럼 떠돌지만 정말 가능한 이야기인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소믈리에 나이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프랑스 브랜드인 샤토 라귀올이고 이탈리아 브랜드인 레그노아트의 제품은 서열로 따지자면 넘버 투 정도 된다. 둘 사이의 가격 차는 굉장히 크다. 어떤 제품을 구입할 때 이른바 가성비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편이다. 좋은 물건을 사서 오래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가장 좋은 브랜드의 두 번째 비싼 물건이 적절한 선택이라는 나름의 노하우도 있다. 플래그십 모델은 기능이 과도해 오히려 사용이 불편한 경우가 많다.


소믈리에 나이프를 구입하면서도 생각이 많았는데 라귀올은 와인 오프너의 가격으로 과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고 동물의 뿔을 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조금은 있지 않았나 싶다. 디테일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능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이 제품을 선택했다. 레그노아트의 오프너는 와인을 오픈하는데 불편하지 않고 나무의 질감이나 전체적인 발란스도 나쁜 편은 아니다. 다만 중국 OEM 제품의 고질적인 문제인 마감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가 힘들다.


이 소믈리에 나이프는 두 개를 구입해 아파트 건너편 동에 살던 지인에게 하나를 선물했다. 그 댁의 둘째와 우리 집 둘째의 유년시절 많은 것을 함께 한 가족이기에 아이의 어릴 적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들이다. 그로부터 십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현재 그 가족은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 이민 가방에 이 오프너도 넣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가족이 떠나고도 한참 후였다. 서로 시차가 잘 맞지 않아 이제 연락은 뜸하지만 소믈리에 나이프를 사용할 때마다 건강한지 별 일은 없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다들 잘 지내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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