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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Oct 09. 2022

난리통, 북새통, 김치통

그린킵스 김치통


어릴 적 가장 싫어하는 도시락 반찬은 김치였다.


나의 어머니는 살림을 잘하는 분은 아니었다. 당연히 맛있는 요리도 할 줄 몰랐다. 일단 음식에 쓰는 돈을 아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과 아이들 여섯, 달걀 프라이만 해도 한 끼에 달걀 여덟 알을 써야 했다. 김도 마찬가지였다. 불고기도 한두 근 해서는 표가 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아이들의 옷과 신발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아이들의 '워너비'는 단연 나이키 운동화였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짜가'들이 판을 쳤다. 멀리서 보면 다 나이키 운동화 같았지만 한 끗이 달랐다. 조르기도 전에 어머니는 내게 선뜻 그 운동화를 사주었다.


먹는 음식과 달리 좋은 옷과 신발은 그 집안이 넉넉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했다. 스무 살에 시집와서 고생 끝에 집도 짓고 가정도 번듯하게 일으킨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자랑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다니면서도 내 도시락 반찬은 늘 김치였다. 반찬 투정을 할 수 없었다. 여섯 형제는 두어 살 터울이었고 그 여섯의 도시락을 모두 싸야 하던 시절도 꽤 길었을 것이다. 음식 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어머니는 매일 아침 여섯 아이들의 아침을 차리고 여섯 개의 도시락을 쌌다. 그 고단함을 이제는 알지만 그때는 소시지부침을 싸오는 친구가 부러웠다. 드러내 놓고 말은 못 하고 항의의 표시로 김치 반찬을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가져와 부엌에 내놓곤 했었다. 물론 어머니는 상관하지 않았다.


맛이 없었어도 남기지는 말 걸, 너무 뒤늦은 후회이다.


그래서 배춧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면서 걱정을 하는 아내의 말이 이해되지가 않았다. 여름에 닥친 이상 고온으로 고랭지 배추의 작황에 심각한 타격이 왔고 배추 한 포기 값이 만 원이 넘어가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거였다. 아내에게 한 마디 했다. 배추가 비싸면 안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아내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 나를 쳐다봤고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 아니냐는 마리 앙투와네트처럼(앙투와네트가 이 말을 했다는 근거가 없다고 한다) 물정 없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내게 김치란 도시락 반찬통 속에서 냄새를 풍기는 것에 불과했다. 가끔 새서 노트를 적실 때도 있었다. 맨밥이 목에 막힐까 봐 겨우 간이나 맞춰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 김치였다. 도시락에서 해방된 뒤에도 내게 김치란 짜고 맵기만 한 '배추 조각'이었다. 나이가 들어 김치찌개나 두부김치 같은 것을 즐겨 먹게 되었고 보쌈이나 삼합에도 김치를 곁들여 먹게 되었지만 온전히 내 입에 들어가는 김치란 일 년에 한두 포기가 채 되지 않을 것이었다.



김치에 대한 나의 생각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한국인은 넉넉하게 김장을 해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듯하다. 아내 역시 김장을 꼭 해야 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한동안은 처가에서 한꺼번에 김장을 했다. 아침부터 서둘러 플라스틱 김치통들을 싣고 처가에 간 뒤에 해가 질 무렵이면 김치가 꽉 찬 플라스틱 김치통들을 싣고 귀가했다. 플라스틱 김치통, 불투명한 하얀색에서 나노 기술이 추가되었다는 황토색 플라스틱 김치통까지, 여러 번 바뀌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 겨울, 왜 김치통은 플라스틱이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음식을 담는 용도로 플라스틱 재질의 용기를 사용하지 않은 지는 꽤 되었는데 왜 김치통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김치 따위 신경 안 써, 김치에는 젓가락을 대지 않던 나의 식성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의 옹졸함을 반성했다. 한 번 담은 김치는 옮겨 담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다음 해 김장에 맞춰 스테인리스 김치통을 준비했다.


스테인리스 김치통의 가격은 생각보다 비싸 마음먹고 장만을 해야 할 정도였다. 김치냉장고의 사이즈를 재고 여기에 들어맞는 김치통의 조합을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김치통의 개수가 많고 크기가 큰 데다 구조도 간단하지가 않아 기름을 바른 휴지로 하는 첫 세척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돈을 주고 작업을 맡길 데가 있으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긴 과정을 통해 이 김치통들이 우리에게 왔다.


작년 아내와 둘이 김장을 했다. 언제까지 장모님께 신세를 끼칠 수도 없었다. 배추를 절이고 씻고 물을 빼고, 무를 채 썰어 갖은양념을 넣어 버무렸다. 집 안 곳곳에 고춧가루가 튀고 묻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치가 완성되었다. 속을 넣은 김치를 스테인리스 김치통에 꼭꼭 눌러 담았다. 왠지 뿌듯했다. 꽉 찬 김치통을 보면서 든든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제야 조금 헤아릴 수 있었다. 제 아무리 추운 겨울이 온다 해도 이제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내겐 저 많은 김치들이 있으니.


하루아침에 김치를 많이 먹게 되지는 않겠으나 이제 김치 방관자에서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 듯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스테인리스 통의 김치들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도 얼렁뚱땅 아내와 김장을 하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배춧값이 걱정이고 어디에서 속이 꽉 찬 배추를 구할까 궁리 중이다.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오므라이스, 카레 등등. 다시는 그것을 먹을 수 없다면서 울적해하는 친구들도 본다. 미안하게도 나는 어머니의 음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짜고 맵기만 하던 도시락 반찬, 김치가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만으로 기억할 수 있다. 활기에 차 새벽부터 문밖에 나가 앞집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어머니, 숫자 감각이 뛰어났지만 빌려준 돈을 뜯기고 속상해하던 어머니, 속상한 마음을 오래 가지고 있어 봐야 나만 손해라면서 훌훌 털고 잊어버리던 어머니, 쾌활하던 어머니, 아이 여섯 모두 끝까지 키우고 가르쳤던 어머니, 늘 우리를 응원했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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