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자비한 햄스터 May 12. 2024

[독서모임]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책은 아쉬웠지만 알잘딱깔센 훌륭한 모임원들과의 독서 모임!


까놓고 얘기하겠다! 기대했던 것만큼 유용한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저자가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을 요약하고, 본인의 의도대로 엮어놓은 것이다.

'나 쇼펜하우어 알아~^^' 하기엔 적절한 책이지만 그뿐이었다. 감동은 없었다.


대학 시절 내내 가방 속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 있었다.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내 영혼을 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바꿔버렸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에 대해 물어보면 핵심 메시지나, 내용 구성 등은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영혼을 울렸던 그 어휘와 문장들, 그것을 읽었을 때의 내 감정은 도저히 전달할 수가 없다.


많은 위인들이 쇼펜하우어를 존경했던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이 책에선 그게 느껴지지 않았다. 요즘 트렌드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혹은 출판사)의 의도 때문인지 별안간 '평범한 자기계발서'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오늘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읽으며 든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아주 즐겁고 유용했던 이번 독서 모임에 대한 이야기도 중간중간 해보겠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독서 모임에서 다뤘던 질문들




'고통'은 당연하다!


책에서 가장 유용했던 부분을 꼽으라면 쇼펜하우어가 '삶, 고통, 행복'을 논하는 부분이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살려는 의지를 충분히 갖고 있으나,
이 의지가 충분히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성을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로 보았다. 누구나 영원히 살려는 맹목적인 욕망이 있다. 하지만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을 전제로 한다면, '모든 인생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인간이 행복을 인지하는 것은 어렵지만, 고통은 매우 잘 알아차린다. 행복한 순간은 짧고, 알아차리기도 어렵게 지나가버린다. 지나고 나서 '그것이 행복이었구나'라고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통은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를 거슬리게 한다. 99%가 문제 없더라도 1%가 불편하면 그 사람은 불편한 부분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고통을 겪고,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본성 또한 인간이 고통스럽고 불행한 이유라고 한다.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요소다.

이 부분도 흥미로웠다. 주변을 돌아보면 매 순간 투덜거리는 사람이 종종 있다. 이렇게 하면 이래서 불만, 저렇게 하면 저래서 불만인 식이다. 주변 사람들은 한두 번 맞춰주다가 '언제나 투덜'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체념하고 만다. 쇼펜하우어는 누구에게나 이런 모습이 있다가 말한다. 돈이 없으면 없어서 고통이고, 돈이 많으면 무료함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최신 스마트폰을 샀을 때 처음 며칠 동안은 기분이 좋다. 좋은 카메라로 사진도 찍어보고, 새로운 기능도 체험해본다. 하지만 점점 그 흥미는 떨어진다. 그 좋은 사양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최신 스마트폰을 가졌어도 이제는 '최신 스마트폰을 가졌다'는 사실로 즐거울 일은 없다.



저자는 '고통과 권태라는 양자택일 앞에 놓여 있는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모임 사람들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사례를 찾아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해보았다. 


(이하 의견 요약)

김기웅 - 취업 준비에서 고통을, 취업 후 무료함을 느끼고, 다시 커리어를 생각하며 고통을 느낀다. 이러한 삶의 주기에 최선을 다하며 받아들이려고 한다.


배서영 - 대학교 자체휴강 등,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일이기에 무료함과 동시에 불안감이 들었다. 어차피 고통과 무료함을 왔다갔다 하는 거라면 조금 초연한 태도로 삶에 살아야겠다.


재원 - 내가 무언가를 이루면 결핍이 채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 기대가 오히려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은 쾌락이 아닌 높고 낮음이 최소화된 상태이기에, 기쁨을 바라지 않는다면 고통 역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햄 - 퇴사 후 '시간이 많으면 재밌을 것이다'라는 착각을 했었다. 곧 무료한 시기를 맞이했었다. 책임감을 갖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고통도 적고, 무료함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요커 - '늙어서 호기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이 없어서 늙는 거에요'하는 80대 시니어 모델이 말이 생각난다. 귀찮고 힘들어도 끊임없이 성장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




에토스가 부족한 쇼펜하우어의 주장


에토스(Ethos)란 말하는 사람의 신뢰도를 뜻하는 개념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주장을 해왔는지, 그것이 일관되었는지 등... 나는 쇼펜하우어의 어떤 주장들에서 '에토스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우선 왜 에토스가 부족하다고 여겨졌는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쇼펜하우어는 사람과 교류하는 일이 드물었고, 대부분 혼자 시간을 보냈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에 실패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여성혐오 관점을 갖고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가 물려준 돈으로 노동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


위 사실들 때문에 쇼펜하우어가 다음의 분야를 논하는 데에는 에토스가 부족한 듯하다.

*필자는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음을 밝힌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책을 읽으며 '불편하다!'는 부분을 편파적으로 선별했음을 밝힌다. 쇼펜하우어의 의도가 아닌 저자의 생각일 수도 있으나 이를 구별할 지식은 없다.


(여러분은 쇼펜하우어의 배경를 감안하고 아래 주장을 읽었을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가?)

사랑을 논하고, 관게를 논하는 것
- 남녀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육체적인 관계이다. 사랑의 최종적인 목적은 후손을 낳는 것이다.
- 사랑은 죽음으로 끊어지는 생명의 의지를 이으려는 노력이다.
- 정신적인 교감이 바탕인 연애는 환상이다.
-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교의 욕망이 생기는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반증이다.
- 지적 능력이 떨어질수록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


돈에 대한 여유로운 태도
- 돈은 바닷물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 재산이나 부의 가치와 비교해 더 가치 있는 것은 지적인 교양이다.
- 상속으로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은 자본을 안전하게 관리하며 돈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 가난했던 사람은 빈곤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어쩌다가 우연히 굴러들어온 부를 향락과 낭비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 '상속받아 평생 노동하지 않고 지적인 교양을 쌓은' 쇼펜하우어.


개성을 강조하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태도
- 남과 다른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일, 누구나 가는 길이 아닌 내가 가는 길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 미래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으로 급히 쫓아가는 반면에 현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즐기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이고 확실한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 좋은 말이다! 하지만 요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시기마다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끊임없이 미래를 고민하고 노력해도 내 상황이 나아지는 건지 의심스럽다. 이런 것들을 제대로 고민할 여유가 있을까.




동정심에 관하여


모임을 진행하며 '동정심'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쇼펜하우어는 동정심을 긍정했지만, 저자는 칸트와 니체 의견을 제시하며 다양한 관점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쇼펜하우어 - 동정심이야말로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비이기적 특성이며, 이기주의적 개인이 타자를 도우려 하는 것은 기적 같은 일로 찬사를 받아야 한다.


칸트 - 팔이 안으로 굽듯이 동정심과 연민이 너무 자의적일 수 있다. 우리 이웃의 피해와 먼 외국의 피해를 비교할 때, 당연히 가까운 쪽의 고통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보편적이 기준이 될 수 없다.


니체 - 동정심은 이타심이 아니라 이기심의 표현이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약자들의 이기심이다.


모임을 진행하면서 동정심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나눠보았다.


난 '동정심'이나 '연민'에 대해선 루소의 관점을 지지한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집단이 유지되는 것은 이성이 만들어놓은 법, 제도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가여워하는 연민이라는 감정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기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고, 그것을 강화하는 것은 반성'이라고도 했다. 이성을 단련한 사람일수록 연민의 감정을 억제하고 이기심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모임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김기웅 - 동정심은 누군가 내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 우리 가족이라면? 이라는 생각으로 도와주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배서영 - 순수한 이타심이 아닐지라도 결과가 좋으면 '선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범위'를 타인까지 확장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원 - 동정심으로 누군가를 돕는 것은 양쪽에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선민의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뉴요커 - 동정심보다는 타인에 대한 아량이 필요한 듯하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행동하고 아량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


박문지 - 동정심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느낌을 주고, 그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면 '위험하다'고 여겨진다. 넘어진 노인을 도왔더니 지인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면 어쩔 뻔 했냐, 큰 일 날 뻔했다'며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이하 '동정심'을 이해하는 모임원들의 관점 전문)





모임 후기


오늘 참석한 사람 중 마흔 근처인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 한참 어린 분들(20대 초중반)도 왔다. 삶에 진지한 태도를 갖고 계신 분들이었다. '마흔에 읽는 니체' 책을 읽었던 분도 두 분이나 계셨다.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던 차에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고 오신 분도 계셨다. 얘기를 하는 동안 다섯 명의 인생관이 부드럽게 융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질문 준비하는 것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책은 너무 방대한 범위를 다루고 있는데, 깊이는 너무나 얕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 집중해야 할지 몰랐었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 생각할 만한 거리가 있다고 여겨진 부분을 중심으로 준비했다. ㅠㅠ 그런데도 모임원들은 알잘딱깔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주시고 진심으로 대화에 참여해주셨다!!!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모임에서 공동저자로 수필집 출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