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에서 살던 우리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시흥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만 키우던 평범한 주부로 살던 삶이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이들도, 우리 부부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즈음 우리는 처음으로 식당을 열었다. 가게는 1층에 있었고, 생활공간은 3층에 있었다. 다행히 큰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막내아들은 식당 옆 건물 2층에 있는 미술 어린이 학원에 보낼 수 있었다.
식당일에 쫓기다 보니 막내는 자연스럽게 만화를 보며 어린이집 등원 시간을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가끔 만화에 빠져 지각하는 날이 잦아졌다. 이러다가는 아예 늦잠꾸러기가 될 것 같아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 아들이 만화 보느라 어린이집에 늦어요. 내일부터는 선생님께서 10분 일찍 오라고 해주시면 좋겠어요."
엄마 말보다 선생님 말씀을 더 잘 듣던 시절이었다.
그날 저녁, 하원한 아들은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엄마, 내일은 아침 일찍 어린이집에 가야 해!"
선생님이 일찍 오라고 했다고,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아들은 한 번도 지각하지 않고 어린이집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집 발표회 날이 다가왔다. 부모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었는데, 아들은 아침부터 입이 뾰족하게 나와 있었다.
"아들, 오늘 엄마 아빠가 네가 친구들이랑 춤추는 거 보러 갈 거야."
하지만 아들은 울먹이며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알고 보니 무용 발표회에서 흰 타이즈 신어야 하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여자아이들만 신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참을 달래고 설명한 끝에 겨우 유치원으로 보냈다.
오후, 발표회 시간이 되어 공연장으로 갔다. 반짝이는 의상을 입고 친구들과 나란히 서 있는 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사실 다른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는 오직 내 아들만이 보였다. 음악이 흐르고 동작 하나하나를 따라 할 때마다 부모님들의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냥 아기 같기만 했던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서 씩씩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어느새 이렇게 컸을까. 아이가 성장하는 순간순간마다 부모도 함께 성장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서 1년을 보냈다. 학교 적응도 하고,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랐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가게일로 바빴지만, 다행히 아들은 운동을 좋아해 유치원이 끝나면 태권도 학원을 다녔다.
어느 날은 태권도 도복을 입고 집에 와 "태권!" 하고 힘차게 기합을 넣으며 시범을 보였다.
그 모습에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렇게 아들은 자랐고, 이제 그의 딸, 내 손녀가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있다.
한 달 전에 손녀가 다니는 어린이집 크리스마스 행사에 부모님 참관수업을 키즈카페에서 있었다. 할머니도 참석해도 된다는 말에 사돈어르신과 나란히 함께 가게 됐다.
돌이 지난 어린아이부터 무대 앞에서 노래에 맞추어 율동이 시작됐다.
우는 아이도 있었고 엄마를 보고 달려가는 아이도 있었다.
마지막 순서로 손녀와 친구 5명이 손잡고 등장했다.
맨 앞에 나오는 손녀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 엄마 아빠 할머니를 보더니
“엄마”라고 큰소리로 말해서 한바탕 웃게 되었다.
선생님의 손동작과 음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손녀는 무대 바닥에 그어진 선에 발을 맞추려 중간중간 밑을 내려보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말은 고지식한 정도로 잘 듣는 어린이였다.
선을 맞추어 춤을 추라는 선생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이
어쩜 아빠를 꼭 빼닮았다.
다섯 종류의 춤과 노래를 따라 부르며 무대를 마무리했다.
“춤 잘 추는데”
“엄마 선생님이 비밀이라고 한 번도 집에서 춤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손녀가 아들을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유치원에서는 영어, 수학, 국어 수업이 기본이래요."
아들의 말을 들으며 새삼 세월이 빠르다는 걸 실감했다.
환경도, 교육도,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 손녀가 넓은 세상을 보고 듣고, 키만큼 마음도 쑥쑥 자라나길 바란다. 부모가 그러했듯, 이제는 할머니로서 또 다른 성장의 시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손녀가 어린이집 친구 이야기 선생님이 했던 말들을 하나씩 풀어내 말을 할 때 보면
어느새 나도 옛 추억이 떠올라 미소를 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