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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끄적쟁이 Mar 27. 2024

원작을 부수는 챠니

듄 파트 2 후반부

이 문서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의 스포일러를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원작은 가부장 사회

여성은 숨겨진 수수께끼의 수호자로 남아 있고,
남성은 위험을 무릅쓰고 수수께끼 속으로 뛰어든다. - 프랭크 허버트


소설 '듄'은 1965년에 태어났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에 해당하는 나이다. 60년 전 시대상이 반영된 탓일까. 먼 미래를 다루는 SF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명확히 정해져 있다. 제시카와 폴이 대표적이다. 베네 게세리트로서 출중한 능력을 지닌 제시카를 보면, 왜 그녀가 레토의 첩이자 폴의 어머니 역할에만 머무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심지어 생명의 물을 마시고 대모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퀴사츠 해더락의 탄생을 위한 길을 열어주는 예언자의 위치에 만족한다. 뭔가 수동적이다. 반면 폴은 도련님 때부터 리더로 키워진 데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는 아트레이데스 가문과 프레멘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일인자가 된다. 어머니와 똑같이 생명의 물을 마신 다음은 어떤가. 메시아이자 은하제국 황제의 자리는 남성인 폴의 차지다. 소설 속 세계는 귀천을 불문하고 가부장제가 견고히 뿌리내린 사회다.


1965 VS 2024


원작 900쪽의 분량을 5시간 20분(파트 1, 2 합산)에 녹여내기 위해서는 축약과 각색이 불가피했다. 원작에서 나름 역할을 했던 투피르 하와트나 펜링 백작, 프레멘 여인 하라 등이 빠진 것이 '영화적 각색'이라면, 챠니의 역할 변화는 2024년이라는 현실을 반영한 '시대적 각색'이라 할 만하다. 원작을 보면 챠니는 '여성스럽다'. 물론 듄의 세계에서 이 말은 단순히 순종적이고 남자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는 모든 것을 가져가는 고대의 힘과, 나눠주는 고대의 힘이 있어. 자신의 내부에서 남자는 가져가는 힘이 존재하는 곳을 힘들지 않게 마주 볼 수 있지. 하지만 주는 힘을 들여다보는 건 남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하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여자의 경우에는 상황이 반대이지. - 소설 '듄'


음양의 원리처럼 남녀가 각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얼핏 보면 남자 귀족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듄의 세계도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 배후엔 언제나 베네 게세리트 여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소설 속 챠니는 '베네 게세리트에 가까운' 챠니이다. 


'저 애는 용감하고 사랑스러워. 그리고 아아, 머리회전이 아주 빠르구나. 훈련을 제대로 받았다면 정말 훌륭한 베네 게세리트가 됐을 거야.' - 제시카


전사 챠니


반면 영화에서의 챠니는 프레멘 최고의 전사이다. 폴과 함께 로켓 런처를 쏠 때도, 그와 로맨스를 즐길 때도 주도권을 쥔 것은 언제나 챠니이다.


이렇게 전사로서 챠니의 면모를 강조하려다 보니, 임신 및 출산 에피소드는 그녀의 행동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원작에서는 폴이 하코넨 가문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챠니는 두 사람의 아들인 레토 2세와 함께 새로운 시에치에 피신해 있는다. 그러다 하코넨 부대의 습격으로 아들이 사망하게 된다.)


또한 영화의 챠니는 이룰란 공주와의 삼자대면에서도 원작과 달랐다.


*원작의 상황

챠니: 내가 이 자리를 떠나기를 바라나요, 무앗딥?

폴: 당신에게는 어떤 칭호도 필요하지 않게 될 거라고 내가 지금 맹세할게. 저기 있는 저 여자가 내 아내가 되고 당신은 첩에 지나지 않겠지. 하지만 저 공주는 내 이름 외에 아무것도 갖지 못할 거야. 내 아이도, 내 손길도, 부드러운 눈길도, 내 욕망의 순간도.

챠니: 지금은 그렇게 말하겠지. 

(챠니가 이렇게 말하며 방 건너편에 있는 키 큰 공주를 흘끗 바라보았다.)

챠니: 나도 이유를 알고 있어.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우슬.

- 소설 '듄'


파트 2의 챠니는 자신이 폴이 유일한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떠난다. 폴을 무척 사랑하지만 첩의 자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리에트의 딸, 챠니


챠니가 원한 건 대등한 관계였다. 폴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자주적 삶을 원했다. 폴을 메시아로 추앙하는 프레멘들에게 분노하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녀는 프레멘 스스로의 힘으로 아라키스 행성을 바꿔놓길 원했다. 파도트 카인즈의 손녀이자, 리에트의 딸이었으므로...


그건 리에트의 명령이오.


프레멘은 우주 조합에 엄청난 양의 스파이스를 뇌물로 바치고 있었다. 위성이나 그 밖에 비슷한 것들을 프레멘 거주구역 하늘에 설치하지 않는 대가이다. 그렇게 까지 해서 리에트가 숨기려던 것은 무엇일까. 나무를 심는 것, 그리고 그 나무를 말라죽지 않게 하기 위한 지하 저수지를 만드는 것이다. 챠니의 할아버지 파도트 카인즈가 말했듯이 생태계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에게 봉사한다. 생명체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해 주는 것도 다른 생명체이다. 생명체의 종류가 다양해질수록 이들이 공급하는 영양소 역시 점점 풍요로워진다. 행성 전체가 활기를 띠고 살아나면서, 생명체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관계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막행성의 구조 전체를 자급자족적인 시스템으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단 3퍼센트뿐이다. 시하야('사막의 샘'이란 뜻의 챠니의 별칭)는 그 3퍼센트의 마중물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


듄 파트 1은 '이번에는 누가 우리를 억압하러 올까?'라고 말하는 챠니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듄 파트 2는 폴과 결별하고 모래벌레를 마주한 채 홀로서기에 나서는 챠니의 눈빛으로 끝난다.

폴 원탑인 원작을 깔끔하게 부수어 버린 챠니.

듄 파트 3에서 폴과 챠니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본문 속 사진 출처: 영화 '듄 파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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