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1962-1985)
커버사진 출처: viajar entre viagens
프랭크 허버트의 단편집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단연 '듄으로 가는 길'이었다. 소설 '듄'과 관계된 유일한 단편이라니... 나 같은 '듄친자'에게 이보다 강력한 미끼는 없었다. 16개의 이야기 중 가장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었지만 가장 먼저 읽게 된 건 당연지사.
'듄으로 가는 길'은 아라키스 도보 여행자를 위한 일종의 13페이지짜리 '관광홍보책자'이다. 시간이 한참을 흘러 영화 속에서 보았던 치열한 전쟁터는 예루살렘, 로마, 이스탄불과 같은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타지마할을 능가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공 건축물 '아라킨 궁전'. 궁전 입구에서는 뉴욕의 관문 자유의 여신상처럼 관광객을 맞이하는 '성 알리아 아트레이데스 조각상'이 있다. 근위병 교대식을 즐기는 이라면 무앗딥의 개인 오니솝터 정비를 마친 수행원이 '그분의 물은 안전하다!'라고 외치는 퍼포먼스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관광의 마무리는 역시 기념품. 이룰란 공주, 던컨 아이다호의 공식 초상화를 구입하면 뜻깊은 관광의 추억이 될 뿐 아니라, 은퇴한 프레멘과 프레멘 고아들을 돕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 단편집이 관심을 끈 이유는 '듄'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오직 '듄'의 관점에서 이야기들을 읽기 시작했고 예상대로 제법 많은 듄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허버트가 '폭력'을 대하는 자세
'정신의 장'이라는 단편에는 승려들이 다스리는 세상이 나온다. 영원한 평화를 꿈꾸던 그들은 '폭력을 혐오하게 만드는 기구'를 만들어, 모든 태아들에게 주입시킨다. 그렇게 만들어진 1000년 간의 평온. 하지만 폭력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투지를 잃었고, 나아지고자 하는 동력을 상실했다. 세상은 서서히 죽어갔다.
'공청회'에서는 '지속 방출 레이저기'가 등장한다. 누구나 손쉽게 제작, 사용가능한 대량살상무기. 이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화를 잘 다스려야 한다. 이웃의 심기를 거스르면 모든 사람이 다 목숨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현명하게 관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한 사람이나 집단에만 맡기기에는 너무도 큰 힘. 이 '폭력적인 큰 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허버트는 말한다. 이 세계는 폭력적이라고. 이 안에서 생존하려면 적절한 폭력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권력을 쥔 한 사람이 우리 운명을 좌우하려 드는 건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에 이 힘을 최대한 빨리, 널리 퍼뜨리는 것이 최선이라 여긴다. 그가 폴과 같은 메시아를 경계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가 AI 개발에서 어느 한 회사가 독주하는 것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질서 정연한 세상의 두 얼굴
'규정 제일주의'에서는 혼돈에 맞서 정확하고 정돈된 행동 체계,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그게 이 세상 모든 규정집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의 기계'에서 인류문화의 편집본에 해당하는 팔로스 문화는 사람들의 불만이 증가하도록 프로그램한다. 불만이 모험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주고, 인간의 잠재력을 거의 최대치로 발휘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생명의 씨앗'에는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키울 작물을 연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생물학자 호니다는 가장 길쭉하고 대가 곧고 이삭이 길고 완벽한 옥수수 대신 병들어 앙상하고 씨앗을 겨우 생산할 수 있는 옥수수를 선택했다. 새로운 행성의 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은 놈들이다. 예상대로 그놈들 살아남았다. 새로운 행성에는 그곳만의 룰이 있는 것이다. 아라키스에 프레멘만의 관습이 있듯이.
허버트는 일정한 틀과 질서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 안에서는 역동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때로는 틀 자체를 뒤흔들만한 혁명적인 변화도.
우리 둘 다 이곳의 문제를 알지. 지나친 편안함, 지나친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있어. 삶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해. 어쩌면 그게 살아 있는 우주의 유일한 기본 법칙일지도 모르겠군.' - 단편 '도시의 죽음'
사건의 감춰진 진실
벼룩에게는 그 벼룩을 뜯어먹는 더 작은 벼룩이 있고, 그 작은 벼룩은 더 작은 벼룩이 물어뜯고, 그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된다. - 조너선 스위프트
'탈출의 행복'에는 '밀기(Push)'라는 기술이 나온다. 밀기는 정찰병의 확실한 귀환을 유도하기 위해 내장된 안전장치였다. 또한 정부에 반항적인 군인이 자기만의 세상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는 정신조작 장치이기도 했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외부 행성에서 원주민을 만나고 복귀하는 데이루트는 한 가지 의문을 품는다.
'왜 밀기라고 부르지? 당기기라고 부르지 않고?'
'GM 효과'의 세계에는 '105 화합물'이라는 게 있다. 피험자의 의식을 유전적 계보의 어디로든 보낼 수 있고, 거기서 선택한 조상으로 '빙의(?)'되는 약이다. 듄에 등장하는 '생명의 물'이 산삼이라면, '105'는 인삼이랄까. 아무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약이다. 사실 'GM(유전기억) 효과'는 다이어트약 개발 도중 생긴 사이드 이펙트였지만 군에 정보가 흘러들어 가 국회위원 협박 및 군사용으로 변질되고, 개발자들은 죽음을 맞게 된다.
'살인의 결정'을 보면 무한한 삶을 사는 자가 등장한다. 다만 겉모습은 수십 년마다 한 번씩 바뀐다. 주인에 해당하는 자의 정신만 다른 몸으로 이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숙주에 해당하는 몸이 수명을 다해가면 근처에 있는 싱싱한 몸으로 옮겨가 그 사람의 정신을 살해하고, 그 껍데기를 차지한다. 만약 몸의 주인이 철저한 복종을 맹세하면 한 몸을 둘이서 공유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원래 인격이 있는 편이 주변 사람들의 의심을 덜기 수우니까. 한 몸에 공존하는 여러 개의 자아. 겉모습과 진짜 주인은 다를 수 있다. 은하제국의 진짜 주인이 베네 게세리트인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갈 뿐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프랭크 허버트의 단편집에는 그의 사상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모두 담겨 있다. 또 단편에서 그가 시도한 아이디어 중 많은 부분은 장편 소설 '듄'에도 녹아들어 있다. 반대로 듄에서 파생된 이야기도 있다. 아마도 나와 같은 '듄친자'라면, 이 단편집이 다른 형태로 바뀌어진 '듄'의 세계를 만나볼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