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bobusang Apr 11. 2024

가난은 왜 불행이 되지 못했나

“미궁아 너는 커서 뭐가 될래?”


 한국 사람치고 키가 크고 코가 큰 한 남자가 아이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서 곧 잘 묻곤 했다, 너의 희망이 뭐냐고. 그럴 때면 자기 부모도 물어 본 적 없는 앞날에 너는 대답이 궁해져 씩 웃음으로 답했지.


 70년대 구미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네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구미로 왔다. 코오롱 구미 공장에서 큰 도로를 마주하고 있는 작은 동네에 네 식구가 정착했다.


 이동네에서도 몇 채 남지 않은 단칸방 초가집이었다. 초가지붕에서는 굼벵이가 떨어졌고 비가 오는 날에는 양동이 두서너 개가 좁은 방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해마다 장마철에는 부뚜막까지 빗물이 차고 넘쳐도 네 부모는 말없이 빗물을 퍼내고 젖은 세간살이를 말렸다. 아랫동네는 낮은 지형 탓에 집이 물에 잠겨 나룻배를 띄우는 걸 보면서 너는 그들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이듬해 여름이 오면 작년 같은 물난리를 똑같이 겪으면서도 누구네가 이사 갔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예전 대중목욕탕을 운영할 정도로 부자였던 주인집은 그때에 비해 가세가 기울었다 한다. 하지만 여전히 기와집 몇 채를 소유하고 있는 소위 지주 집안이었고 네 집이 유일하게 남은 초가집이었다.


 주인집에만 텔레비전이 있어서 당시 국민 드라마였던‘여로’를 볼라치면 깐깐한 주인집 두 딸의 눈총을 받아야 했고 깨끗한 양말로 갈아 신고 나서야 마루에 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동네 부잣집 마나님들이 네 엄마를 만나면 당신 딸이 크면 며느리 삼아야겠다는 농을 치곤 했다. 그 말이 너의 자부심이 되어 어디를 가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먼 훗날 여닫이문이 달린 17인치 흑백 텔레비전을 들여놓던 날 너는 엄마한테 말했다.

           “텔레비전을 방에 누워서 보는 게 꿈만 같아.”


 네 아버지는 1공단이 조성되고 있던 때라 한창 수요가 많던 벽돌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비가 오는 날이나 시멘트에 물을 붓자마자 굳어버리는 추운 겨울이 오면 쉬는 날이 다반사였다.


 쉬는 날이면 가족을 데리고 창경원으로 공원으로 놀러 나갔고, 산에서 머루며 달래를 한 가방씩 따 오던 아버지를 좋아했다.


 네 아버지는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 동네 골목길을 자기 마당 쓸 듯했다. 부지런하고 성실해 벽돌 공장 책임자가 되면서 객지에서 온 인부들 숙소까지 마련해 주었다. 마음이 여렸던 네 엄마는 어린 동생을 업고 매일 인부들 밥을 해 나르면서도 군소리 한번 없었다.


 인부들은 너희들을 조카처럼 여기면서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어쩌면 그들이 있어서 세 들어 살아도 당당했고, 가난하기 때문에 약자가 되어 착해질 수밖에 없었을 때에도 천성으로 착각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한 골목에 살던 또래들보다 한두 살 많은 언니들과 놀았다. 이른 봄이 오면 언니들을 따라 뒷산 무덤에 핀 꼬부라진 할미꽃 꽃대를 꺾어 빨아 먹으면서 한나절을 보내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12월이 다가오면 크리스마스 선물이 탐난 언니들을 따라 산꼭대기에 있는 교회에 갔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아버지가 있다는 걸 알았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이 세상에 슬픈 노래가 있다는 걸 알았다.


초가집이 헐리면서 두 번째로 마련한 집은 네 아버지가 일하던 벽돌 공장 한쪽에 임시로 지은 집이었다. 네 아버지가 손수 벽돌을 쌓고 슬레이트를 몇 장 얻어 추위만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어른들은 허리를 숙이고 겨우 들어갔고 30촉 백열등을 대낮에도 켜야 했다.


 처량하기 그지없던 그 시절을 어쩌면 너와는 다섯 살 터울이 나는 동생 덕에 행복한 시절로 추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잘생기고 똑똑했던 네 동생을 데리고 나가면 지나가던 사람조차 돌아봤다. 또래 엄마들이라면 안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었지. 그 시절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소리를 자주 하던 때라 네 부모에게도 고된 삶의 한 줄기 빛이 되었던 아이였다.


 네 아버지는 벽돌 공장에서 아직 공장이 들어서지 않은 모래밭 부지를 임대해 수박 농사로 전전했지만, 어느 것 하나 재미를 보지 못했다. 수박 농사를 짓는 해는 장맛비가 잦았고, 겨울에는 뼛속까지 바람이 들었다.

 직물 회사에 취직했지만, 경기를 타는 업종이라 삼 년마다 우르르 회사 문을 닫았다가 되살아나고를 반복했다.


 한 번 입사하면 당신 스스로 사표를 던진 적이 없지만, 본의 아니게 실직과 취직을 반복했다.


 생활이 불안정해지자 네 엄마는 동생을 한 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공장에 취직했다. 어린 동생은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 과자가 놓여 있는 걸 보고 엄마가 도망간 거 아니냐고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은 너를 교실밖에서 기다렸다. 엄마가 점심 시간에 점심도 먹지 않고 집에 들러 집안 청소를 해놓고 과자를 사 놓고 간 거였다. 어렸지만, 어렴풋이 가난의 고달픔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열 달 치 방세를 내는 날짜가 다가오면 방세를 올려달라고 할까 봐 네 엄마는 몇 번이나 주인집 문 앞에서 서성이다 그냥 돌아왔다. 그러다가 방세를 올려달라는 말을 들은 날에는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하고 수시로 돌아서 눈물을 닦았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너는 절대 약하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도 네 기억 속의 가난이 불행이 될 수 없었던 시절을 살아 참 다행이다.


부잣집 아이보다 가난한 집 아이가 공부를 더 잘 하기도 했던 시절이다.


 부자 부모만 속이 탈 뿐 자식들은 부자가 뭔지 가난이 뭔지도 모르고 코를 흘리며 어울려 다녔다.


학교에서는 소시지에 계란말이를 싸 오는 친구보다 김치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오던 친구가 더 많았던 때라 그것이 가난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면 콘크리트로 지은 집 옥상에서 새하얀 블라우스가 바람에 나풀대고, 방에는 단발머리 소녀가 있다. 너는 네 아버지가 월급날 사다 준 사탕 한 알을 입안에서 돌돌 굴리며 일기장을 쓰기 시작한다.


   “과일 사탕 향이 입안 가득 퍼질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라고.

이전 02화 유년의 추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