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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bobusang Apr 21. 2024

평생의 빚이 있다면

“관계와 애정 없이 인식은 없습니다. …

애정이야말로 인식을 심화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라고 고 신영복 교수는 말한다. 


 이 말을 다시 풀어 보자면 인식은 관계가 있어야 시작되지만, 관계가 있어도 애정이 없으면 인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곁에 많은 사람을 두고도 우리가 외로운 이유다. 그것이 비록 천륜으로 맺어진 관계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어린 시절 너와 너의 오빠를 돌이켜보면 그렇다.  


 홀로 자식을 낳고 길러온 할머니에게 첫 손주는 당신 아들 이상의 존재였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품속에서 자랐던 네 오빠도 엄마보다 할머니에게 더 애틋했다. 


 너희 가족이 고향을 떠나 구미로 갔을 때 네 오빠는 당연하다는 듯 가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는 할머니를 혼자 고향에 두고 떠나지 못했다. 네 오빠는 그럴 정도로 정이 많고 여리다.


 두 살 터울인 너와는 형제간의 정보다는 싸운 기억이 앞선다. 싸움을 거는 쪽은 늘 둘째인 너였다.


 뭐든 잘 먹고 건강했던 너와 달리 어릴 때부터 영양제, 육류는 입에도 안 댈 만큼 입이 짧았다. 


 성격도 예민했고, 자존심이 상하거나 속상하면 며칠씩 곡기를 끊을 정도로 고집도 셌다. 그래서 네 엄마가 속상해하는 걸 보면서 그의 독한 성격이 너는 못마땅했다. 조용한 성격에다가 허약한 걸 보면서 얕잡아 보는 것도 있었을 게다. 


 네 오빠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시(市)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전학을 하면서 할머니를 떠나 너희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동안 자주 왕래가 있었지만, 6년여라는 시간은 너희 남매가 서로에게 낯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네 오빠는 먼저 동생들에게 손을 내밀었고 형제라는 울타리를 갖고 싶어 했다. 동생들이 하는 걸 괜히 참견도 하고 말을 걸며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럴 때마다 너는 오히려 더 쌀쌀맞게 굴며 그를 외롭게 했다. 


 그는 중학생이 되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불도가 센 집안에서 장손이 제사 때 절도 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는데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를 두둔하고 지지한 사람은 할머니였다. 어쩌면 그에게 종교는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 된 집에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의지처였는지도 모른다.


 네 오빠는 장남이었지만,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는 기술 장려에 나섰고 그런 사회 분위기에 따라 앞으로는 공부보다 기술이 더 먹고 살기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고등 학교 3학년에 올라 가면서 수업이 끝나면 용접 기술을 배우러 야간 직업훈련소를 다녔다. 보호구를 착용해야하고 자기 몸에는 버거운 훈련이었는데도 장남이 할 도리라고 생각했는지 단 한 마디의 불평도 없었다.

네 오빠는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현대 조선소에 용접공으로 취업이 되어 울산으로 갔다. 


 네 오빠가 가방을 챙겨 떠나던 날 왜소한 뒷모습을 보면서 너는 가슴이 저려오는 아픔을 느꼈다. 그제서야 그 뒷모습을 남기고 떠나는 사람이 네 오빠였음을 알았다. 


 떠난 후, 기숙사에 있으면 동생 편지가 기다려진다고, 동생들이 제일 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서 너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단 한 번도 따뜻한 눈길조차 주지 않은 동생을 때로는 자랑스럽게 때로는 의지하면서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형제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삶의 뿌리를 공유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그 어떤 조건과도 맞물리지 않는 순수한 사랑에서 출발해 가장 나중까지 먼저 마주할 관계이다. 어린 시절, 그런 소중한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형제애로 승화시키지도 못했다. 너의 근원 없는 오만 때문에. 


너의 일생에 오직 하나 갚지 못할 빚이 있다면, 네 오빠가 필요로 할 때 주지 못한 다정함, 제때 내밀지 못한 손이다. 너는 그 빚을 갚고 싶다는 마음을 평생 품고 살 거 같다. 

누군가는 말한다. 성인이 된 자기 가슴 깊은 곳에 상처 입은 어린 자신이 살고 있다고. 


 너의 가슴 깊은 곳에는 한 번이라도 따뜻한 눈길을 주길 기다리면서 쓸쓸히 웅크리고 있는 네 어린 오빠가 살고 있다. 


 너는 반평생을 살고도 꿈속에서 이유도 모른 채 소외당한 가여운 어린 새를 만난다.  


 아직도 너의 가슴에 멍울진 소망이 있다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다. 


“오빠, 밖이 따뜻해, 같이 나가 놀까?”

그를 일으켜 두 손을 마주 잡고 환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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