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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구 안 막혔나요?

대학원생의 성장일기 27

by 포텐조

벽돌 시리즈 이십칠 번째

글을 쓰는 시점에서 직장인들의 퇴근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을 보노라면 드릅게(?) 느리게 가는 분침과 시침을 보노라면 일단 한숨장전. 퇴근 후 집에 가는 도중, 눈 아프게 앞차의 빨간 등들이 시야를 이내 가로막는다. 차가 막히는 건 언제나 짜증이 나고 도중에 끼어드려는 차를 보면 각자의 차 안에서 음소거 욕을 퍼붓거나 경적을 울린다. 나도 방금 외출할 일이 있어 나갔다가 기름을 주유소에 넣고 돌아오는 길에 신호등의 빨간 신호에 차를 멈추고 문득 짜증 나는 감정이 올라옴과 동시에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 언제나 그렇듯 거창한 건 아니다.

짜증 나는 감정을 가진 채 집을 돌아오거나 다른 상황으로 나를 옮기게 되더라도 그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거나 오히려 또 다른 상황 때문에 더 자극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연속선상에서 "기분 잡쳤다"라고 느끼며 이불을 뒤집어쓴다. 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감정을 무작정 "예" 또는 "아니요"로만 판단하기에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확히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긴 하지만 감정을 달리 보면 기분이 좋다, 나쁘다로만 양분화하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다들 한 번쯤 우연히 이런 내용을 접해봤을 것이다. "하루에 인간이 하는 생각이 수천 가지가 된다"는 것. 더 나아가 경험하는 상황과 행동은 무수하다. 그렇기에 이에 도출되는 감정들도 비례하여 무수하다. 그런데 사람은 마주친 무수한 상황 중에 문득 단일 상황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강렬히 느끼며 오늘의 생각과 감정을 기쁘거나 나쁘거나 단 둘로만 판정 짓는다. 실상은 24시간 동안 온갖 감정을 느끼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다 보니 이미 감정의 외길이 잡힌 것이다.


그날의 감정이 결정되면 그날 하루가 자의든 타의든 그것대로 흘러간다. 자기가 인식하든 못하든 하루를 보내다가 문득 돌아보면 자기의 감정대로 파인 하루에 대한 느낀 점을 확증하게 된다. 욕이 나온다 "아씨 못해먹겠네, 아 퇴사하고 싶다. 저 인간 왜 사냐. 등등" 이미 파인 감정의 길대로 내버려 두면 물은 잘 흘러가긴 한다. 어딘가 막히거나 임팩트 있는 경험이 있기까지 사람은 심지어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렇게 살아간다.

자기를 돌이켜 보는 건 일상을 변화시키는데 굉장히 중요한 첫출발인 것 같다. 누가 뭐라 하든 안 하든 자기가 자신을 살펴보지 않으면 이미 파인 길은 절대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 갈수록 고집이 세지고 옛날 사람이라 취급받는 건 자기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깊게 파인 길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은 낯선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경험과 생각에 대한 "범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자기 일상이 예스냐 노냐가 아니라 비율로 생각하게 되면 이 막혀버린 물길을 넓힐 수가 있다. 어떤 이는 "비율로 따져도 결국 높은 확률을 차지하는 감정이 하루를 결정짓는 거 아니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도 일정 부분 맞지만 이것도 개인적으론 결정적인 정답은 아닌 것 같다. 비율이 크더라도 결재받으러 온 여러 감정의 대표를 뽑는 선택권자는 결국 본인이다. 화가 아무리 나더라도 일상에서 차분함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을 한 번쯤은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또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화가 언제 났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놀기도 한다.


하나의 감정에만 몰빵 하다 보니 다른 선택지를 버리는 것은 본인을 케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기쁜 감정이 가득 찬 사람이 그렇게 믿어왔던 사람의 뒤통수에 감정의 격동과 혼란이 큰 것은 그동안 기쁜 것에만 몰빵 했기 때문이다.


무지개처럼 다양한 감정의 범위를 파악하면 왔다 갔다 하는 자동차 속도계처럼 어느 순간은 어린이보호구역을 또 어느 순간은 세 자리 숫자를 넘어가는 속도를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드라이브가 재밌을 수 있듯이 일상도 재밌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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