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일기 벽돌시리즈 367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삼백 육십 칠 번째
한 가지 의문을 가지는 건, 요즘 유행하는 혹은 줄 곧 이야기하는 "매일 기상했을 때 떨리는 일이 각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목표를 추구하는 삶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나만 그런 건지는 몰라도 매일이 가슴 뛰지는 않는다. 물론 문자 그대로 직역하는 오류이거나 비유로써 목표를 가슴에 품은 채 살아야 한다는 말일수도 있지만 이를 정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목표의 부재와 현 상태의 괴리감 때문에 죄인에 가까운 무거움을 느끼고 강박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한도 끝도 없는 시선과 비교의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목표의식은 자기를 어디론가 인도해 주리라 생각하고는 한다. 그곳이 마치 파라다이스처럼. 어떤 위대한 꿈을 바라는 이들이 누군가에게 당위적인 목표치를 제시하며 목표에도 귀하고 천한 것을 따지려 든다.
어느 노래에서 "고졸엄마면서 나한테는 서울대 가라고 하네"라는 비슷한 가삿말이 떠올랐다. 획일적인 목표의 당위성을 어느새 강요하고 있는 사회. 그리고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사회적 성공과 성취가 각자의 목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한번 쯤만으로 생각하고 넘어갈 화두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왜 우리 또래들이 명절에 친척들과 만나기를 꺼려하는지 그리고 부모들끼리 카페에 모여 자식자랑 랩배틀을 하는 것, SNS에 도배하고 있는 명품의 향연들을 보노라면 목표의 획일성이 행복을 망치고 있다 생각한다.
어느새 내 논리는 목표의 분량에도 생각이 미치게 된다. 즉 남들처럼,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체크리스트가 도저히 달성이 안 되는 순환을 겪고 있다면 이는 나만의,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목표가 아닌 셈이다. 참 먼 길을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이라도 알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랄까? 학창 시절 혹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모두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들을 때면 "그거 가지고 안된다", "그것밖에 안 하나?"라는 말을 듣고는 했다.
자기의 시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자의적인 판단으로 남을 바라보게 되고 자기 시선으로 남에게 조언을 해준다. 설령 그것이 진심으로 남을 위한 것이라 해도. 조언은 조언으로만 그쳐야 한다. 이를 실제로 적용하기까지는 철저히 스스로에게 맞추어야 하며 자기 자신과 먼저 친해질 필요가 있다. 나를 알기 전에 나와 친해져야 한다. 과거의 탄압자였던 나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야 하며 나를 용서하고 나에게 관심을 표해야 한다.
생각보다 이 커다란 괴리감으로 지속적인 부담감과 상처를 받게 된다. 알게 모르게. 누구는 이 나이에 결혼하고 누구는 이 나이에 차를 사고 어쩌고 저쩌고 나 빼고 다 잘되고 있는 일들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일이다. 물론 그것으로 동기부여가 되어서 나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친다면 참으로 다행이지만 어느 임계점에 다다르면 지치게 되고 화가 난다. 열등감은 분노가 되고 분노를 삭이면 다시 무기력해진다.
오늘 당신이 짜놓은 목표가 어디까지 도달할지는 모른다. 그런데 매일 일상에서 부여된 목표가 과연 정말 자기 자신에게 맞춰 놓은 목표일까? 한계를 정해 나는 요만큼만 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 그 과정이 혹자가 이야기하듯 가슴 뛰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일상의 영역이기에 당연한 것이며,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목표를 따라 하기 때문에 도저히 이뤄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첨언하여 내 일말의 경험으로 본다면, 목표는 목표 그 자체에도 성장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목표의 덩치가 작더라도 하다 보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말이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화살 수는 많지가 않다. 그렇기에 더더욱 맞추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하다보면 화살 수가 늘어나든, 맞출 확률이 올라갈 정도로 능력이 오르든 뭐든 오르게 되어 있다.
[독자와 저를 위한 일말의 영감, 벽돌시리즈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