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일기 벽돌시리즈 368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삼백 육십팔 번째
"늑대가 나타났다!" "구라(?) 치지 마." 진짜라니까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억울해도 소용없다. 눈앞에 늑대들이 도착해서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듣지를 않는다. 늑대가 나타나든 어디서 적군이 나타나든 그가 하는 말을 모두가 이제는 믿지 않는다. 결국 양들은 잡아 먹히고 말았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 이야기는 거짓말을 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댓가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다.
문득 떠오른 우화의 메시지에서 다른 관점이 보였다. 흔히 거짓말의 업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말 자체의 무게감에 대한 초점이었다. 그것은 진실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진실을 이야기해도 여러 번 남발하면 가벼워지는 문제가 첫 번째로 있을 수 있겠다. 매번 늑대가 나타날 때마다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마을 사람들이 물리쳐도 그 정보의 중요도에 따라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일 확률도 있다는 것.
항상 가스불을 꺼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안전의 메시지든 교훈이든 좋은 말 바른 말은 우리 일상에 널려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과연 소중히 하는지 돌이켜 본다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이는 안전불감증으로 나타나 결국엔 진실을 여러 번 외쳐놓고 알고는 있으나 사건 하나 크게 터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늑대가 매번 나타남을 알면서도 별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마을 주민들이라면.
공기처럼 널려있는 진실된 교훈은 "맞아봐야 안다"라는 깨달음으로만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리를 추구하거나 혹은 사실을 중요시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진리의 문제 혹은 사실의 문제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지,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 순수성이 보장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각자만의 필터를 걸쳐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든 아니면 수많은 정보중 하나로만 인식하든 그것도 아니면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이든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둔감해진 정보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 한 번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와서 정신 차린(?) 양치기 소년이 진실만을 말한다 상상해 보자. 마을 사람들은 그 소년을 거의 기계처럼 생각하며 정직 그 자체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년이 심심했던 나머지 아무 일도 없는데 늑대가 나타났다고 이야기를 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진실을 말하던 그의 입에서 거짓말이 있음을 알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정직이라는 그의 이미지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서 분노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년은 실수라고 변명을 해보지만 마을 사람들은 나락 간 그의 이미지에 더 이상 정직이라는 키워드를 가져다줄 수 없다. 뒤늦게 후회하지만 소용이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 마치 원래의 양치기 소년 이야기의 정반대 버전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심각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진실과 거짓의 문제가 아님을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짓을 여러 번 이야기하다 진실을 이야기하면 의아해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진실을 여러 번 이야기하다 거짓을 말하면 의심하게 되는, 인간의 태생적인 안정욕구에 반하게 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될지 모른다. 부정편향에 민감한 인간은 신뢰하던 인물의 거짓말을 더욱 민감히 여기는 것은 이에 기반한다.
더 나아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이야기하는 군주의 처세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군주는 공포를 기반으로 다스리다가 한 번의 선한 행위가, 선함으로 다스리다가 한 번의 공포를 일으키는 것보다 통치에 더 효과적임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독자와 저를 위한 일말의 영감, 벽돌시리즈는 계속됩니다.]